"혹시나 제가 오늘 찾아온 것, 남편에게는 비밀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순간 속이 왈칵 답답해졌다. 나는 천양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P72

천양희는 만삭이었다. - P70

・・・……… 가지고 있기는 해요. 돌려달라면 당연히돌려드릴 수도 있고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건………… 천양희 씨한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텐데요." - P67

그 차가 떠나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있었다. 놀라거나 화가 나서는 아니었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그 클랙슨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그것을신호로 하여 갑자기 모든 것이 명료하고 밝아졌기 때문이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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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수업은 금요일 오후 세시삼십분에 시작했다. - P9

별 뜻 없이 지나갔던 문장들을 그녀가 그녀만의 관점으로해석할 때,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도 좋았다. 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 언어화될 때 행복했고, 그 행복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던 종류의 감정이라는 걸 가만히 그곳에 앉아 깨닫곤 했다. 가끔은 뜻도 없이눈물이 나기도 했다. 너무 오래 헤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P11

오락실 주인이 돈을 쥐여주면서 이제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그녀는 ‘죽지 않고‘ 게임을 이어나갔다. - P18

‘그곳은 용산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다.‘ 그녀는 이어서그렇게 썼다. 페이퍼백 영어 소설들을 읽으며 그녀는 용산으로부터도, 자신의 언어로부터도 멀어질 수 있었다. ‘영어는 나와 관계없는 말이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쓰던 말이 아니었다. 내게상처를 줬던 말이 아니었다.’ - P19

그는 온통 붉어진 얼굴로 내게 사과했다.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가 내 말을 끊었을 때, 그리고 내 발언을 평가절하했을 때 약간 무안했을 뿐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말을 끊고, 내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상황이 내게는 익숙했다. - P24

나는 아직도 그 말을 하던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가 잔인함을 잔인함이라고 말하고, 저항을 저항이라고 소리 내어 말할 때내 마음도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날것 그대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덜 외로워졌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그럴 수 없었던, 그러지 않았던 내 비겁함을동시에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31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33 - P33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찾을 수 없었다. 구 년 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 보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 P43

나도, 더 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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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서기 전, 현관 옆에 붙은 전신거울로 내모습을 비춰보았다. 평소 입는 옷차림 그대로에 화장기없는 맨얼굴이었으나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도일 아내와의 약속 시간은 9시였다. - P65

"나쁜 뜻은 아니에요. 그냥 그게 이제 상관없는남한테 있다는 게 좀 마음에 걸려서. 아직 갖고 계시면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 P67

"양희 씨 몸도 안 좋은데 어서 집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잘 해결하고 화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기가 너무 심하게 굴었다고 후회하고 있네요." - P77

막 돌아서려는데 바닥에 무엇인가 떨어져 있는것이 보였다. 아까 천양희가 서 있던 그 자리였다. 쪼그려 앉아 허리를 굽혀 보니 내가 건네주었던 냅킨이었다. 눈물을 꾹 눌러 닦은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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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믿고 싶은 마음은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 P72

빨리 배우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오래 할 수 있다. 또인생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니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을만날 수도, 그 나라에 가볼 수도 있지 않나.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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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매우 강한 수면제를 먹었지만 새벽녘에야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다행히도 그날은 토요일이라 집에 있을 수 있었다. - P53

토요일 저녁이 시작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혼자 취리히 거리를 산책했고 자유의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거리 모퉁이마다 연애 가능성이 널려 있었다. 미래는다시 하나의 신비로 되돌아갔다. - P55

우울했던 아름다운 이틀 동안 그의 동정심이 (감정적텔레파시라는 이 저주) 쉬고 있었던 것이다. - P57

토마시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네, 그래야만 합니다!
Ja, es muss sein!" - P60

테레자의 호흡이 한두 번인가 가벼운 코 고는 소리로변했다. 토마시는 추호도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느낀 유일한 것은 위를 누르는 압박감, 귀향으로 인한 절망감뿐이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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