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수업은 금요일 오후 세시삼십분에 시작했다. - P9

별 뜻 없이 지나갔던 문장들을 그녀가 그녀만의 관점으로해석할 때,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도 좋았다. 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 언어화될 때 행복했고, 그 행복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던 종류의 감정이라는 걸 가만히 그곳에 앉아 깨닫곤 했다. 가끔은 뜻도 없이눈물이 나기도 했다. 너무 오래 헤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P11

오락실 주인이 돈을 쥐여주면서 이제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그녀는 ‘죽지 않고‘ 게임을 이어나갔다. - P18

‘그곳은 용산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다.‘ 그녀는 이어서그렇게 썼다. 페이퍼백 영어 소설들을 읽으며 그녀는 용산으로부터도, 자신의 언어로부터도 멀어질 수 있었다. ‘영어는 나와 관계없는 말이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쓰던 말이 아니었다. 내게상처를 줬던 말이 아니었다.’ - P19

그는 온통 붉어진 얼굴로 내게 사과했다.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가 내 말을 끊었을 때, 그리고 내 발언을 평가절하했을 때 약간 무안했을 뿐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말을 끊고, 내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상황이 내게는 익숙했다. - P24

나는 아직도 그 말을 하던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가 잔인함을 잔인함이라고 말하고, 저항을 저항이라고 소리 내어 말할 때내 마음도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날것 그대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덜 외로워졌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그럴 수 없었던, 그러지 않았던 내 비겁함을동시에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31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33 - P33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찾을 수 없었다. 구 년 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 보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 P43

나도, 더 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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