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준이 찾아간 곳은 젊은 의사가 원장으로 있는 오피스가의 작은 병원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보톡스 등의 미용 시술 가격표와여러 할인 이벤트에 관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 P131

이제 와 알은체를 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고, 마침 간호사가 가도 된다기에 그대로 병원을 나섰다. 그리고그날 밤에 근육통과 미열이 있어 늦도록 잠들지 못했고, 구토가치밀어 화장실에 갔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봤다고 그녀는 썼다. - P135

"부드럽게, 중요한 건 부드럽게 물어보는 거야. 캐묻거나 다그치면 안 돼. 알겠어? 캐릭터가 스스로 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부드럽게." - P137

9월의 첫날, 명준이 그 섬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여름이었다.
바람은 섬을 감싸고 돌며 폭풍우와 태풍을 막아준다는 검은 바위들을 지나 살갗에 끈적함을 남기고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 P140

배우의 얼굴은 빈 캔버스와 같아야 한다. 젊음과 늙음,
남자와 여자, 인간과 동물, 생물과무생물이 공존하는 가능성의얼굴, 그러다가 번개의 번쩍임에 의해 어둠 속의 얼굴이 일순간드러나듯이 연기를 통해 어떤 표정이 노출된다. 인식적 클로즈업.
그리고 알아봄. 그 모든 사랑의 발생학. - P143

엄마 없는 아이는 사랑도 없으니까말없이, 그저 말없이 바람 노래 들어보네." - P145

밤의 해변에 서서 명준은 어둠을 바라봤으리라. 어둠에는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멀리서 규칙적으로 반짝이는 빛도,
대지의 윤곽을 만들며 밤하늘로 은은하게 번지는 빛도 있었으리라. 그 어둠 앞에서 명준은 어떤 기미를 느끼려고 했으리라. 누군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어두운 해변 여기저기를 바라봤으리라. 그렇게 그는 혜진과 다시 해변에서 만났다. 둘은 해변에 앉아 메스칼을 나눠 마셨다. - P149

혜진이 말했다. 명준은 그건 어쩌면 자신이 병원을 나설 때마다했던 좋은 생각, 엄마가 퇴원하는 상상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생각했다. 울음을 멈추는 데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던 것들. - P151

그렇기에 그 울음은, 말하자면 피에로의 재담 같은이러니의 울음이었다.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혜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 그렇게 엄마 없는 첫 여름을 그는 영영 떠나보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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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상 속에서 메기는 다른 노래에 사는 수재나를 만나 배조를 메고 알핀로제가 만발한 베르네로 향했다. - P64

계속 나만 볼 거예요?" - P66

그러자 곡류에 휘말리는 물살처럼 나는 급히 꺾였다가 무언가를둥실 타넘었다가 차고 따듯한 기류를 넘나들며 밑으로 밑으로 하강했다. 벌써 내 육신의 세포들이 부패하기 시작한 것이다. - P69

"괄호?"
"비난도 칭찬도 아닌, 괄호, 판단 이전의 괄호." - P71

"나한테 발가락 하나 정도는 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발 한쪽을 다 주진 못해도 자기 발가락 하나로 내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까짓거 준다고." - P75

"슬퍼한 사람." - P80

세모는 치과에 갔을까. 사랑니를 뽑았을까.
내가 꿈에 나타나면 세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 P84

나는 몰랐는데 내 상상은 어떻게 아는 걸까. 난 끝났는데 지금여기서 뭘 하는 걸까. 죽었는데 아직도 뭐가 두려운 걸까. 죽어서도 죽지 않는 감정이 있다면 노래가 끝나도 혀끝에 맴도는 멜로디가 있다면 누군가의 꿈에 찾아가 어떤 말을 해야 한다면. - P86

그러니당신은 기쁘게 내 꿈을 꿔주길. 분명먹어요 대학오늘밤은 엄마, 엄마의 꿈으로. 주커피우유 가지고 갈게요. 멋지게 빨대 꽂아줘요. - P94

밤마다 저는 악몽을 꿉니다. - P95

저는 ‘연다‘는 말의 숨은 뜻을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어쩌면 제 꿈 꾸세요」라는 소설은 그렇게 환영 인사가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잘 가, 라는 작별인사와 함께 - P98

거듭 헤어질지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존재들영영 나타나지 말라고 깊숙이 매장한 공포들그 두 개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 글을 씁니다. - P99

잎이 무성했더라면 보이지 않았을 새들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날 수 있을까요. 날면서 울고 날면서 싸고 양쪽 덮깃을 날렵하게 오므렸다가 떼 지어 솟구칩니다. 추락과 급선회, 민첩한 공중회전이 눈부시게 자유롭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우리에게 영혼이란 것이 있다면 새의 나는 모습과 비슷할 겁니다. 공기의 움직임은 물의 움직임과 같은 원리라고 하니 영혼의 모습은 물고기의헤엄과도 닮았을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저는 꿈속에 있는것 같습니다. 꿈의 몸이 되어 누군가를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싶어집니다. 꿈꾸는 모든 존재가 폭 잠들기를 바랍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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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깨어날 때는 귀부터 깨어난다. - P101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더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지 못한다는 것"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었다. 아내에게 죽음이란더이상 신간을 읽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더이상 읽지 못할책들이 거기 켜켜이 쌓여 있었다. - P102

며칠 뒤 책이 배송됐다. 목차에 「모래 폭풍」이라는 챕터가 있어그 이야기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열풍을 피하기 위해 닫아건 1스 유리창 너머로 태양에 직사된 흰 모래언덕이 눈부셨다"라고 글은 시작됐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 이르러 아내가 말한 인도말이
‘캇땀 호 가야‘라고 나와 있었다. 거기 적힌 대로, 언젠가의 그녀처럼 "캇땀 호 가야"라고 읊조리는데 어딘가 좀 이상했다. 하지만그때는 왜 이상한지 알지 못했다. - P103

"사실은 바람을 찾고 있었어요."
그가 말했다.
"제 눈에는 전혀 안 보이는데요?"
"안 보이는 것이라 찾고 있었지요. 이렇게."
그가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자르갈도 따라 했다.
"캇땀 호 가야." - P105

그렇게 시간은 쌓이고 또 쌓여 한없이 깊어졌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사막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에서 본 ‘깊은시간deep time‘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깊은 시간이 그의 눈앞에펼쳐져 있었다. - P107

"괜찮아요. 땅이 물러서 발이 빠져요. 미끄러지지 않아요."
먼저 내려가 주변을 살피고 온 피디가 말했다. - P109

"이를 응시하는 우리 앞에는 우리의 삶과는 다른 삶이, 우리자신들 그리고 다른 것으로 이뤄져 있는 또다른 삶이 응집되고해체된다. 완전히 통찰하는 견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무의식적이지도 않은 잠자는 사람은 이상한 동물, 기이한 식물,
끔찍하기도 하고 기분좋기도 한 유령들, 유충들, 가면들, 형상들, 히드라, 혼란, 달이 없는 달빛, 경이로움의 어두운 해체, 커지고 작아지며 동요하는 두꺼운 층, 어둠 속에서 떠다니는 형태들,
우리가 몽상이라고 부르는, 보이지 않는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통로라 할 수 있는 이 모든 신비를 언뜻 본다. 꿈은 밤의 수족관이다." - P110

선배 중 한 명이 말했다.
"서로 싫어져서가요?"
그가 물었다.
"간단해. 헤어질 때는 헤어지는 일에만 집중할 것. 사랑할 때그랬듯이."
헤어지는데, 어떻게 헤어져야 잘 헤어지는 건 - P113

그제야 그는 자신이 바얀자그에서 본 것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건 시간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부서진 돌처럼 흩어져 내린, 깊은 시간의 눈으로 보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공룡의 사체였다. - P118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 P121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른 모든 생명들에게 그랬듯 그들의 인생에도 시간의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렇게 그들은 겹겹이 쌓인 깊은 시간의 지층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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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의 공동 현관 앞에서 수영은 비밀번호를 누르다 말고 쪼그려 앉았다. 여전히 혼자였고 다시한 톨이었다.
학생주 - P206

따스한 물줄기가 기분 좋은 압력으로 쏟아졌다. - P207

상수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미경의 말에 동조하면서도수영이 그때 어떤 얼굴이었을지 자신도 모르게 그려졌다 - P210

"뭐 텔러, 청경 연앤데 신경 쓸 거 있습니까. 막잔 하고들어가시죠. 피곤하고 내일도 출근인데." 상수가 말했다.
본 대로 아니라고 하자니 마 대리를 우습게 만드는 것이고 듣고 있자니 참을 수 없어 하는 말이었다. - P215

점점 추잡스러워지는 대화에 상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나가야 했다. 안 듣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알고 보면멀쩡하고 상식적인 사람들이라서 상수는 더 신물이 났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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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리에서는 산과 산 사이로 굽이쳐 흘러가는 물이 좋아서, 그 물이 강으로 흘러드는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서 산에 오른 적도 있다. 그런데 사람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풍경화를 그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상상력이 더해졌다. - P136

그러니까 내 그림은 풍경 그대로가 아니라 내가 보고 상상한 풍경이다. 예술은 모사가 다가 아니다. 모사는 시작일뿐이다. - P137

내 그림의 특징을 단순한 선, 거대한 덩어리감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산이면 산, 강물이면 강물, 바다면 바다.
나는 그 자체로 덩어리감이 좋다. 사람들이 설치한 다리나전봇대, 인물을 배치하기 싫었다. 군더더기라고 표현하면좀 그렇지만 단순한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 P142

누구에게나 특별히 아끼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 P163

남동생의 결혼식이 있었다. 하얀색 신부 드레스를 입은올케와 붉은색 카펫의 조화가 너무나 아름다워 표현해보고싶었다. - P176

여동생을 그린 것인데 내 눈에는 그 예쁜 모습보다 색과무늬가 먼저 들어왔다. - P178

화제가 붙은 다른 스타일의 작품인데, 유심히 보면 SEE와 THE SEA가 반복적으로 쓰여 있다. 읽기에 따라 ‘누군가 바다를 보다‘ 또는 ‘바다가 바다를 보다‘로 읽히도록 했다. ‘SEE THE SEA’와 ‘THE SEA SEE THE SEA‘가 이어지는 글귀를 화제로 단 것이다. - P186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서귀포 중문관광단지의 풍경들이다. 저녁 무렵이면 남편과 레오와 셋이서 가족 나들이를 자주 하는데, 이제는 나이 때문인지 다가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도 무언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 P188

곧 밤이 올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표시가 있다면, 구부러진 길을 가더라도 안심할 수있다. - P193

나는 모든 색을 다 좋아한다.
흰색부터 검은색까지. - P194

내가 그림과 짧은 글이 어울리는 책을 내는 이유도 이것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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