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부고가 쓰일 때, 내일, 혹은 그다음날. 거기에는 이렇게 적힐 것이다. 레오 거스키는 허섭스레기로 가득찬 아파트를 남기고 죽었다. 내가 아직 산 채로 파묻히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이 집은 넓지 않다. 나는 침대와 변기, 변기와 식탁 식탁과 현관문 사이에 길이 막히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써야 한다. 변기에서 현관문으로 가고싶다면, 불가능, 식탁 쪽을 거쳐서 가야만 한다. - P9

옛날에 한 소년이 있었다. - P19

나는 생각했다. 결국 여기에서 죽으려고 왔나보다. 이 창고는 정말이지 한 번도 본적이 없지 않은가? 어쩌면 이들은 사람들이 말하는 천사인가보다. 밖에 있던 아가씨, 물론이지, 내가 왜 몰라봤을까. 그렇게 피부가 파리했는데, 나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 P31

나는 거대한 야망을 품은 남자인 적이 없었다.
너무 잘 울었다.
과학에 소질이 없었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 기도할 때 입술만 움직였다.
부탁드려요. - P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도록. 나중에도 생각할 시간은 충분하니까. 분석은 소용없다. 우리는 끌질을 하고 있다. 우리는 목재를 손으로 쓸어 본다. 이제 페이지는 더이상 비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뭔가 있다. 그게 언젠가상을 받을 물건이 될지, 서랍 속에서 먼지나 쌓이게 될지 지금 알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는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대리석에 끌질하기 시작했다. 시작되었다. - P68

글을 쓰기 시작하면 머릿속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내보내야 한다. - P79

"어떻게 네가 감히?" 내가 다 큰 어른- 작가이자 글쓰기 교사-이 되자마자 이 말은 어머니가 가장 즐기는 불평이 되었다. "어떻게 네가 감히?" - P87

대학원생을 위한 글쓰기 프로그램을 맡았던 몇 년간, 봄마다 입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의 원고가 담긴 커다란 봉투들이 우편함을 가득 채웠다. 경쟁 프로그램이어서 입학 허가를 받은 작가는 소수에 불과했다. 나는 지원자들의 섬세하고 두근대는 심장을 손에 쥔 마냥 지원서를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았다. - P93

이 과정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상상력은 자체적으로일관성을 갖는다. 초고가 우리를 이끌어줄 것이다. 우리가 원고에서 이전까지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분출하도록 한 다음에도, 생각하고, 다듬고, 구조를 다시 짤 시간이 얼마든지 있다. - P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케일이 큰 뮤지엄들이 있다. 지하 1층부터 지상7층까지 모두 전시장으로 사용하는 파리의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나 600만 점이 넘는 작품을소장한 영국의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같은 곳에 처음 가면 면적에 당황하게 된다. - P33

우선, 가장 편안한 신발을 신고 짐은 최소화한다.
모든 것을 오래 감상하려 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작품 앞에서만 시간을 보낸다. 보고 싶었던 작품이있다면 그것부터 본다. 물병을 챙겨 가 틈틈이 물을마시고 의자가 보이면 수시로 앉는다. 마라톤 선수가자신의 속도를 조절하듯, 규모로 인해 지치지 않기위해 나름의 규칙을 만든 것이다. - P34

다음 날, 수업을 시작하며 선생님은 시조 한 편을읽어주었다. "어제 내준 숙제에서 너희들이 본 장면이이 시조가 묘사하는 이미지다." 보았던 장면을 상상하며시조를 분석하니 한결 쉽게 느껴지고 그 수업 내내내 머릿속에는 물 위에 예쁘게 핀 매화가 띄워져 있었다.
이 배움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 P43

그 와중에 신체의 감각을 최대치로 활용해서 배웠거나잠시라도 마음을 꽉 움켜쥐었던 일들은 여러 사건이 뇌속을 오가는 틈에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 P44

친구는 예술병에 걸렸다고 웃고 나는 너무 좋다며깔깔거리고 웃는다. 세상에, 예술이라니. 술이 깨고보니 어찌나 부끄럽던지. ‘예술‘이란 단어를 입 밖에내는 일은 왜 이렇게 쑥스러울까. 그런 마음을 무릅쓰고술김에 한번 꺼내보고 싶은 이유는 또 뭐람. - P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월이 되었다. 검은 산딸기가 익기 시작하는 때이다. 우리는8월을 맞이한 기념으로 포크너의 <8월의 빛> 라디오극을 들었다. 마을 입구 길가에는 다 익은 사과들이 사과나무에서 떨어져 풀숲에 쌓이고 그곳을 지날 때마다 바닥에서 짓이겨진과육이 부패하는 달콤한 냄새가 가득하다. - P118

‘네가 정말로 재가 되어버려야 한다면, 그게 지금이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아니 그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 내게 속삭인 말이었던가.) ** - P120

그리고 씹을수록 진해지는 곡물 특유의 은은한 단맛. 8월의 아침 공기는 꿀빛으로 뜨끈하며 투야나무 울타리 뒤에서 어른거리며 번득이는 햇살. 우리는 서로에게 말한다. 한 잔의 커피, 그리고 따뜻하게 구운 아침의 빵을 누린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 - P1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관문을 열면 종현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핸드폰으로게임을 했다. 가끔 거실을 닦거나 빨래를 널고 있기도 했다 종현이 무엇을 하든 수영은 들어서자마자 함께 했다. - P221

떨어져 있자 오히려 회복이 되고 있는. - P223

수영은 찌개 냄비의 불을 끄고 식탁에 혼자 앉아 있었다. 차려 놓은 것들이 식어 갔다. - P227

침묵의 모서리가 날카로웠다.
"어디 있었니." 수영이 말했다. - P229

"고작 그 소리야? 말 같잖은 말, 고작 그거야? 그러니더 해야겠다는 생각은 못 해? 내년이라도 내후년이라도기어이 끝을 내 해치워 버려야겠다는 생각은 못 해? 겨우, 그것밖에 안 됐니? 해서 보여 주겠다는 게 이런 거였어?"
PREPA - P223

수영은 흐느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그것을 모르는 척 숨겨야 한다고생각하고 믿었던 것까지 모두 무너져 있었다. - P237

두 사람은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종일셀 수 없이 몸을 섞었다. - P239

며칠 뒤 수영은 상수에게 말했다. "종현이랑 헤어질까요?" - P239

학습은 돼 있었다. 종현이랑 헤어질까요? 그 말은 헤어질지, 말지 물어보는 말이 아니었다. 헤어지고 싶지만 걸리는 것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던 순간의 기분이떠올랐다.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놀랍지는 않았다. - P243

어둑한 실내를 반사하는 창문은 빗물 흐른 자국과 먼지 때가 끼어 있었다. 수영은 며칠 전 석양빛이 뭉개지던자기 방의 창문을 떠올렸다. 손자국이 묻은 자리마다 오렌지를 쥐어짠 것 같은 빛이 맺혀 있었다. 종현과 몸을 섞던 중이었다. 몸을 섞고 또 섞었지만 섞어지지 않는 것이있다는 사실만 절망적으로 확인하던 가을의 오후 수영은떨어져 나와 눈물 짓고 이불을 당기는 대신 종현의 위로올라갔다. 체중을 실어 종현을 받으며 웃으려고 애썼다. - P249

"나가자. 더 좋은 데로 가자." 상수가 말했다.
수영은 웃었다. - P250

좋구나, 참 좋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만 할 수 있어서. 그러지 못하는 수영을 본 뒤라서 더 실감이 되는 것을미경은 나쁘고 못됐다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 P256

"잘했어. 많이 힘들겠더라.
"무슨 얘기해 봤어?"
상수는 당황한 기색을 감췄다. "옆에서 보잖아. 그래 보여서."
{"그렇지? 오늘도 그래 보이더라.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하는 거." - P2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