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의기소침해졌다가도 들뜬 기분을 자제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했고, 조그만 의견 차이도 견딜 수 없어하며 명식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아내는 옆집 사람들이 벽에다 대고 계속자기 험담을 한다며 불안해했다. - P165

두 사람은 1979년 9월에 그해 문을 연 서울 중구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처음 만났고, 석 달 후 결혼식을 올렸다. 상견례 다음날박정희가 죽었고, 결혼식 며칠 전에는 쿠데타가 터졌다. 탱크가한강 다리를 막고 있어서 하객들이 결혼식장까지 제대로 올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1980년 봄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 - P171

돈을 쏟아부어 고도로 전문화된 백수를 양산하겠다는 속셈 아닌가. 명식은 눈앞이 깜깜했지만 미루가 원한다면 그것조차 도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재차 속을 다잡았다. 그동안 악착같이 돈을벌었던 이유도 다 그러려고 한 것이었다. - P173

나는 왜 내게 관심 있는 사람들로부터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P178

그러는 사이 그녀는 아무도 집에 초대하지 않았다. 초대할 수 없었다. 노원은 멀어도 너무 멀었다. - P182

"미루씨는 박사 안 해?"
어느 날 관장이 물었다.
"요새는 작가들도 다 박사더라. 심사 가면 다 박사야."
관장은 힘 빠지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 P185

그토록 사랑하던 세계를 어째서 이렇게나 쉽게 내쳐버리게 되었는가. 그녀는 스스로가 만든 정교한 함정에 빠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너무나도 깊숙이 들어와버렸다. 자신이 인생에 무슨 일을저지른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그녀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 P190

준회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타고난 걸까, 아니면 어릴 때 엄마가 교정을 시켜준 걸까. 준회의 티 없이 완벽한치열을 볼 때마다 주눅이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 P194

"너 그렇게 치명적이진 않거든."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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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경의 시에선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고김혜순의 시에선 아해들 머리 위로 13마리의 새가 하늘을 질주한다 - P52

간척지의 신기루가 붉게 물든 손뼉처럼 새들을 잡아챈다 - P54

나는 이제야 느낀다새가 날지 않으면 세상이 거울처럼 납작해진다는 것그리하여 나의 새는 잠들어서도 날아간다는 것 - P56

나는 경청하려고 애쓴다그녀는 말한다은 워크中小吃가슴에 와닿아 가슴에나는 생각한다 가슴 어디에? 심장에? 아니면 폐에?
아니면 갈비뼈에?
나는 가슴에 와닿는다는 말을 싫어한다 - P59

새들의 영결식이 거행되고 있다새들이 맞댄 머리 위에 죽은 새를 올려 운구하고 있다더 높아서 오히려 검은 하늘로미리 준비되어 있는 새들의 묘혈로 - P63

자아自我라는 이름의 뚱뚱한 소녀를 생각한다그녀를 오늘 밤 굶겨 죽여야 한다그 소녀를 죽이고 내가 해탈에 이르는 것은과거보다 미래를 먼저 죽이는 짓인가 아닌가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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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외진 통로, 열댓그루 남짓 계수나무가 모여 있다. 나 혼자 ‘계수나무 숲‘이라 부르는 곳. 열댓걸음 걸으면끝나는 길이지만 끝까지 갔다 오고 또다시 갔다 오며 넓어지는 곳. 나의 계수나무 숲. - P152

내 안에 있는 한기를 달래기 위해서 내 안에 숨어 있는 온기를 찾아본다. 나를 압도하는 추위가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듯이 내 안에는 여전히 따뜻한 것이 숨 쉬고 있다. - P153

이리저리 돌려보고굴려보고 만져보고 상상하고 꿈꾸고 그 안에서 숨 쉬듯이살아내면서. 나는 이것이 시인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금덜 바쁜 두 눈으로 지금 바쁜 사람을 대신하기. 좀더 홀로여기에 멈춰 있기. 멈춰서 느리게 숨을 쉬기.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마음 위에 돋아나는 싹을 기다리기. 씨앗의 진동을 믿어보기. 나는 이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 P155

이 모든 기억 속의 집은 훗날 시의 공간이 되어주었다. 시를 ‘쓴다‘고 생각하면 막막하고 어려웠지만 허구의공간을 그린다고 생각하면 조금 덜 두려웠다. 내가 만든 공간 안에 화자의 숨결을 채워가는 시간은 신비로웠다. 내가그린 숲, 내가 지은 집, 내가 빚은 여름과 겨울이 숨을 쉬기수
시작한다. - P161

첫 시집을 내고는 꼭 마음에 폭 팬 자국이 생긴 것 같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막을 고백하기에 나의 이야기는 여전히 뒤엉켜 있다. 끝내 고백할 수 없는 것을 간직한채 고백을 이어가는 목소리에는 무력이 묻어 있고, 그럼에도 이어가는 목소리는 얼마나 간절한지.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 건 절실함이었다. 언제나 나를 바로잡은 것이 나를사랑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진심이었듯이. - P167

또다른 여름입니다.
이 책을 품에 안고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반가운 안부를 나누고 싶습니다.
빛과 바람, 돌멩이와 언덕에게마음이 닿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2024년 5월검은개 흰 개와 함께 최지은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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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힘이 상자를 열게 했다는 것 외엔 별다를 것 없는 저녁이었네. 그러나 저녁은 활을 들고 토끼를 켜고 있었지. - P81

얼굴을 휘감으려 하고 있다 - P79

나는 바구니를 들고 약수터로 간다쏟아버리려고 - P30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어둠에 먹혀들어가는 배롱나무가 보였다. - P70

창밖에는 갈대 우거져 있다횃불 든 사람들 오고 있다 - P16

던져야만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모두의 손이 불에 탄 듯새카매져 있다. - P26

그날 이후이따금 너를 소환하곤 해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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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연을 키우는 것과 위스키를 만드는 것, 두 가지 모두하진에게는 사랑을 요구하는, 사랑이라는 이유가 아니라면 할수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 P641

솔직히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맞고내 방에 오거나 내가 어머니에게 가면 그 비슷한 말을 숱하게들었으니까. 좋게 말하자면, 그냥 하는 말일 뿐이었고 독하게받아치려면, 할 수 있었다. - P646

나는 피식 웃었다. 오래전 준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이란 자기가 짓밟히는 건 참아도 자기가 사랑하는 게 짓밟히고 짓이겨지는 건 참지 못한다고,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닌 늘 있어왔던 일이라고. 그 말대로였다. 아버지든 어머니든 날 자기들뜻대로 굴리는 건 아무 상관 없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내가기지 수 없으니까. - P649

사랑이 진실을 만드는 진실이고 의미를 만드는 의미라는 건,
사랑이면 뭐든 할 수 있고 사랑으로 뭐든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이야말로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었다. 하진에 대한 사랑이 내 죄에 선을 그었고 준연에 대한 사랑이 내 공황에 선을 그었고 두 사람에 대한 사랑이 나와 부모 사이에 선을 그었다. 그 선 때문에 내 죄는 결코 떨쳐 낼 수 없는 게 됐고내 공황은 잦아들 수 없는 게 됐고 나는 지금 이렇게 내 부모를침몰시킬 짓을 하고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지켜야 할 선들이생겼다. 사랑하고 있으니까, 더 사랑하고 계속 사랑하고 싶으니까. 사랑만큼 강렬하게 원할 수 있는 건 없기 때문에 사랑만큼강력하게 지켜야 할 선을 긋는 것도 없었다. - P655

이제서야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진의 말들, 행동들, 하진이 내게 했던 사랑을, 그리고 내가 하진에게 했던, 사랑이 되지 못한 채 욕망에 불과했던 그 모든 것들을. 사랑은 기꺼이 두번째가 되어 주는 것이고 서로에게 최악이 되지 않는, 다만 최악을 지워 주는 사람이 되는 것, 그 시도와 노력이고 행위였다.
사랑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누가 시키거나 돈을 준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중심적인 마음만 따른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사랑은 누가 하지 말라고해도,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비좁은 마음에서, 작고 유약한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대단한 사랑, 사랑의 원형 같은 게 아니었다. 어디에나 있고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 결국 모든 부모가 하게 되는 사랑이 바로 그랬다 - P658

그래서 고통이 오직 고통이기만 한 건고통의 크기나 깊이 때문이 아니었다. 그걸 기꺼이 대가로 치를만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치스러운 것들 중에 가장 사치스러운 사랑이, 그 사랑만이 줄 수 있는 행복이 없기 때문에고통은 신물 나는 것이고 욕망도 결국엔 권태로울 수밖에 없는것이었다. - P665

크고 깊게 맑은 공기를 마시고 내쉬며 비강을 헹궈 낸 뒤 다시 위스키를 입안 가득히 채웠다. 홍 씨가 우적우적 복숭아를씹을 때처럼, 입 전체를 우물거리며 안에서 느껴지는 모든 풍미와 맛을 남김없이 빨고 감별했다. 꿀꺽 삼킨 뒤에도 미뢰에 남은 맛뿐 아니라 입천장과 양쪽 벽에 남은 맛까지 혀로 샅샅이훑었고 하얀 입김에 스민 잔향들까지도 손끝으로 더듬듯 음미했다. 역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 P671

나는 책상 위 문진으로 총기 함 자물쇠를 후려쳤다. 고리째떨어져 나간 문을 열어젖히자 엽총 두 정이 약속처럼 나란히세워져 있었다. 나는 사냥터에서 아버지가 들었던 총을 꺼내 들었다. 애꿎은 사냥개나 잡았던 그 총이었다. 서랍을 열어 총알도 꺼냈다. 아버지가 웃으며 내 귀 옆에 대고 흔들었던 돼지탄이었다. - P674

노래가 끝났다. 노래는 끝난다. - P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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