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이미 해답을 얻었거나 발견한 단계를 사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나이 든 사람은 으레 다알고 이해하려니 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답을 얻은들 질문이 마를쏘냐. - P36

옛날 서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입문 의식을 통과하고 죽은 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영성의 구현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1960년에 말리 출신 작가 아마두 앙파테바는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탄 것과 같다"
고 했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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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는 내가 그 등허리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걸 알아차렸다.
"그 사람은 장이 안 좋아서 참외씨를 먹으면 안되는데 단걸 좋아해서 참외 속은 먹고 싶어했지. 그래서 참외씨를 하나하나 발라내야 했어. 내가 대리를 달았을 때니까 스물여섯이나 일곱쯤 됐을 때다. 그때 만나서 4, 5년쯤 사귀다 헤어진 사람인데, 회사 다니는 사람은 아니고 공부하는 사람이었지." - P94

그땐 아래아한글이 없어서 보석글을 썼다. 너는 모르겠지만 내가 하이텔이니 천리안이니 하는 통신을 시작한게 서른대여섯쯤이었고, 한때는 통신중독에 게임중독이기까지 했다. 블로그는 귀찮아서 하다 말았고, 싸이월드 좀 하다가 트위터와페북으로 갈아탔지. 사실 나는 가족들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온라인 관계를 끊는 게 더 힘들 정도였다. 그건 주어진 게 아니라 내가선택한 거였고, 오로지 내가 쓴 글, 내가 만든 이미지만으로 구성된우주였으니까." - P97

그녀는 서둘러 술과 안주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인터폰 벨소리는 멎어 있었고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기진맥진하여 반찬가게에서 사온 돌게장을 꺼내놓고술을 마셨다. 조금씩 술이 오르면서 그녀는 세운 무릎 위에 손을엇갈려 얹고 그 위에 턱을 고인 웅크린 자세로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 P101

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 P106

통장에 입금된 여덟자리 숫자를 보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한달에 35만원씩만 쓰던 그녀가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숫자들은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나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졌다. - P107

관희는 멍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갑자기 탁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손으로 눈가를 짚었다. 탁자 왼편의 햇살은 어느새 반짝이는얇은 끈의 두께로 줄어 있었다. 문정은 여기까지만 얘기하자고 생각했다. 그후에 그와 더 만난 건 얘기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어차피헤어졌으니까. - P123

"다르죠. 달라요."
"뭐가 그렇게 달라요?"
"그앤 믿을 수가 있으니까요."
"믿을 수가 있다?" - P127

"그렇게 꽉 쥐지 말아요, 문정씨. 놓아야 살 수 있어요." - P135

관희의 말대로 관주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작년에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산 캐논 600D 카메라는 돌고 돌아 오늘 오후에 문정에게 도착했다. 문정은 카메라를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돌길의 포석만 한 크기지만 무게는 그보다 훨씬 가벼웠다. 흔적도 없이 지워진 그들의 아이와 달리 카메라는 흠집 하나 없이 말짱했다.
메모리는 아무도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의 버려진 헛간처럼 텅 비어있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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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결코 덜 비극적이지 않으며 매일매일의 덧없음을 상쇄해주지 않는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것은 통계적 사실이지만 이것이 개인의 장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양쪽을 다 내려다볼 수 있는 능선에 올라와 있다. - P23

1964년에 <말>에서 "내가 더는 전진할 수 없음을 알았다는 것이 나의 진전이다"라고 했다." 당시 59세였던 그는 "산을 오르는 자의 젊은 취기"가 그립다고 고백한다. - P25

유예란 이런 것이다. 결말의 임시 생략, 근본적인 불확실성.
삶은 이제 탄생에서 죽음까지 날아가는 화살이 아니라 선율적 지속(앙리 베르그송), 켜켜이 쌓인 시간성의 밀푀유다. - P26

삶은 늘 영원한 도입부요, 점진적 전개 따위는 끝까지 없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의 문 앞에 떠밀려 있는 상태로만 시간 속에 정주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 머물되 고정 거주지는 없는 노숙자들이다. - P29

오래 사는 것이 절대 규범이 되면서 문명은 노쇠, 기력 상실,
의존을 더욱더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전히 늙어가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참아주지 않는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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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극장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 P117

영화적 움직임을 복원하려는 의지 - P135

공백과 흰색의 덧칠을 구분할 것 - P141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무덤에서 일어난 순간헛된 기대인 걸 알면서도 그의 걸음이 복수를 향하지 않기를간절히 바랐다. 피츠 제럴드(톰 하디)에게 살해당하는 아들 호크(포레스트 굿럭)의 참상을 목격한 장면부터 이미 내정된 걸음이었지만 그럼에도, 글래스의 처절한 걸음이 종국에는 복수 이외의 다른 곳에 안착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다. - P151

여름, 그리고 밤. 따로 부를 땐 몰랐지만 연달아 입에 올리면 이상한 단어. 그 울림에는 꿈결 같은 애잔함이 깃들어있다. 눈뜨면 사라질 하룻밤 환상 같은 시간. 들뜬 열기만큼이나 선명하게 남은 기억들. 어딘지 포근하고 그리운 작별인사의 추억. 그 모든 흔적에는 한때 모두가 지나왔고, 이제다시 오지 않을 시절에 대한 애상이 묻어난다. <남매의 여름밤> (2020)의 영어 제목은 ‘Moving on‘이다. - P177

지나간 것을 애잔하게 포장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추억이다. 그리고 기억과 추억의 태도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요소는 결국 구체성이다. 주체가 설정되지 않은 공간은 추억이라는 보편타당한 감성으로도 충분히 구현 가능하지만장소는 구체적인 기억을 통해 성립한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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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틀린 얘기는 아니야. 희생정신으로 똘똘 뭉친 옛날 여인이니까. 이타적인 면도 있고 인내심도 강하시지. 중요한 건 무엇을 위한 희생이냐, 무엇에만 배타적으로 이타적이냐, 하는 거 아니겠니?" - P87

그녀는 자기 어머니에 대해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했는데, 그것도 우리 시어머니와 비슷했다. - P87

"이모라고 부르라고 글자도 줄고 어감도 낫잖니? 놀러 올 거면얼른 메모해라. 윤경호, 경기도 안산시......" - P81

태우의 마지막 말은 내게 모종의 압력으로 다가왔다. 이러다 도박빚으로 수배 중인 외삼촌도 며칠 안에 만취한 상태로 남편 품에안겨 우리 신혼집에 들이닥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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