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확신하지 않으면 단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그래서 더욱 피하고 싶었다. 그런 나를이렇게 잡아 앉힌 강설애 편집자는 이 책의 또 다른 저자다. 출판계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나의 영원한장래희망이다. 책 팔아서 버는 돈이 생긴다면책 사는데 쓸 것이다. - P11

책을 펴자마자 쏟아진 문장 앞에나는 얼굴을 묻고 울었다.

나는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남긴 사랑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살면서가끔 필요하고 때로 간절했던 ‘부정‘의 결핍을 나는 그런 식으로 채우곤 했다. - P17

아버지의 부재와 마찬가지로 엄마의 ‘있음‘ 역시 나는 김애란의 소설을 통해 극복했다. - P21

자신이 경험한 세계 바깥을 상상해 보지 못한 채 좁아진 엄마의 삶은 직접적으로 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남편이 벌어 오는 돈으로 살림만 하고 살면 얼마나 좋아." 그런 엄마를 조롱하며 싸웠지만, 엄마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주부‘로 살 때였고, 그래서딸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그 말에 담겼음을 뒤늦게 헤아리고 한참을 후회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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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헛것들. 빛의 자격을 얻어 잠시의 굴절을 겪을 때, 반짝인다는 말은 그저 각도와 연관된 믿음에 불과해집니다. 우리는 같은 비밀을 향해 취한 눈을 부비며 나아갈 수 있을 테지요. 두 눈이 마주치면 생겨나는 무한의 통로 속으로. 이미 깊숙해져 있는 생각의 소용돌이를 찾아. 떠올린다는 말에 들어 있는 일렁임을 다해서.

서로의 눈 속을 걷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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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후 며칠이 지나자 나는 자꾸만 그 다방에 다시가 보고 싶어졌다. - P29

침침한 조명에 익숙해진 후, 다시 한번 휘둘러보아도 아는 얼굴은 없다. 내가 제일 먼저 온 모양이다. 콤팩트를 꺼내 얼굴을 비춰 본다. 눈 화장이 암만해도 눈에 거슬린다.
눈을 크고 맑게 보이게 하기는커녕, 잘하면 곱살하게 보일수도 있을 눈가에 잔주름을 노추(老醜)로 만들어 강조하고있다. 눈가뿐 아니라 얼굴 전체가 몰라보게 늙어 있다. 연일의 겹친 피로 때문일까? - P41

매사를 이런 투로 그에게 장단을 맞춰야 했다. 난 그게서툴렀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어 젠장 서로 장단이 맞아야뭘 해 먹지 하는 투정을 자주 했다. - P47

"예뻐졌다, 얘."
"정말 몰라보게 예뻐졌어."
이십여 년 만에 만난 친구라면 우선 눈에 띄는 게 늙음일게다. 그런데도 그 대목은 살짝 건너뛰어 다만 예뻐졌다고한다. 그게 아마 서울식 인산가 보다. 나는 뭐라고 답례를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냥 나를 시골뜨기처럼 느낄 뿐이다. - P51

분명히 내 내부에는 유독 부끄러움에 과민한 병적인 감수성이 있어서 나는 늘 그 부분을 까진 피부를 보호하듯 조심조심 보호해야 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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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닌 것은 쓰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사랑이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게 없으면 사람은 죽으니까.
그리고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어졌다. 관객과 시청자들이 원하고 그들에게 필요한이야기를. 이전의 나는 나를 위해서썼다. 그렇게 「아가씨」와 다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나는 ‘엄마‘라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정말 아이에게 모든 것을 내주었다. 자고, 먹고, 씻고,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고, 거울을보는 나 자신. 아이를 재우고 기진맥진해진 밤이면 아무것도 없이 텅빈 가슴이 느껴졌다.

아이가 집에 있게 된 상황을 생각하면 다행스럽고 생계를 생각하면 불행하게도, 수업하던 곳 역시대면 수업을 진행할 수 없어 잠시휴관하게 되었다. 집합 금지 명령으로 작업하던 카페들은 문을 닫거나단축 영업을 했고 거리에도 임시 휴무 안내를 붙인 가게들이 늘어났다.
나 역시 개점휴업 상태의 심정으로시간을 흘려보냈다. 소설의 장면이나 문장들은 가끔 나를 찾아왔다가오래 머물지 못한 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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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지켜내야만 했으므로 나는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깊게듣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내가 아는 것과 일치한다는 확신이 생길 때에만 비로소 그 단어를 넣어 문장을 만들었다. - P21

모든 것은 자전거 때문이었다. - P33

나는 모두가 사라진 집, 작은 식탁 앞에 앉아 종이 위에 자전거를하나 그렸다. 내가 그리는 자전거는 곡선이 실제보다 더 둥그렇게 왜곡되어 있어, 명랑만화에 나올 법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 P39

숨이 가빠왔다. 몸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뜨거웠다. 나는 안나처럼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P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숨이 너무 차서 더이상 참을 수 없게되었을 때, 나는 속도에 몸을 맡긴 채 두 다리를 크게 벌렸다. - P47

그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모멸의 순간을, 수치의 기억을 우리는 그렇게 꺼내놓았다. - P55

못했던 P의 불룩 튀어나온 뱃살이 안나를 달릴 때마다 출렁시켰곧 세 개의 자물쇠가 채워질 자전거를 상상하자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흘깃 보니 이번에는 제이가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고 있었다. 나는손가락 끝에 술을 묻혀 빈 테이블 위에 얼굴을 하나 그려보았다. 그얼굴이 어딘가 마음에 들었다. 왠지 나는 이제 유머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 P55

나는 도대체 어쩌다가 폴에게 빠져버린 것일까. - P63

"shock. shock을 한국말로 뭐라고 하죠?"
"충격?"
"응, 충격. 아버지한테는 충격이었어요. yeah, it was a huge shockto him. - P71

"할아버지가 정산에 계셔?"
"네, 산산에요."
"산산?"
"네, 가족들 죽으면 묻는 고향 산요."
"아, 선산이야, 선산, ‘어‘ 하는 발음했다가, ‘아‘ 발음으로, 선산."
"Seon San?"
"응, 선산." - P77

안녕.
나는 속으로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폴은 슬며, 미소를 짓더니다시 뒤돌아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눈앞이 온통아시아인들뿐이라 너무 놀랐어요. 폴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나는 오랫동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폴이 그를 닮은 듯 닮지않은 사람들 틈에 섞여 더이상 구분이 되지 않을 때까지. - P87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십 분이면충분할 것 같았는데, 비바람 탓이었을까, 가는 길이 너무 멀게만 느꺼졌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닐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P101

문득, 그가 독일에 처음 도착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집에 거의도착할 때 즈음 비가 멎었다. 집이 낡은 아파트의 사층에 있었고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그는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오르느라 조금 힘들어했다. - P113

우리는 아쿠아리움의 수족관 사이를 거닐며 시간을 때우고 있어.
약속시간은 훨씬 전에 지났지만 당신의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곳에 들어온 것은 할 일이 없어서였어. 당신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아쿠아리움 건너편 호텔의 프라이빗 레스토랑이었지. - P119

당신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신인 소설가의 신작은 어떤가 읽어볼까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읽고 있을 때, 리는 뙤약볕 아래서 그들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침 여덟시 반에 온다고 했다. 그렇게 일찍 궁을 관광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니. 리는 뭔가 이상하다 - P147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 P177

주말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뭐라고?
주말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 P185

나는 말을 마쳤다. 오랜만에 내 가슴에서 빠져나간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나는 천천히 관찰했다. 내 말이 가닿았는지 부인은 다 알아들었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알아들었을리가 결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았기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있었다. 케이크는 달고, 부드러웠다. - P191

누군가 틀어놓은 라디오를 타고 파업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파업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가 없다고, 라디오 진행자는 빠르고 단정적인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식당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높낮이가 각기 다른 억양과 발음으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한발, 대화 밖으로 떨어져나와 그것을듣다보니 그들의 대화는 성당에서 들었던 성가곡의 가락처럼 들렸다.
창밖은 완연한 여름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곡조의 결을 가만가만짚어보았다. 그리고 그 곡조가 익숙해졌을 때, 고요하게 울리는 그 합창곡에 끼어들기 위해서 나는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살짝 떼었다. - P196

백수린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또하나의 특징은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소재의 차원에 드러난다. 이 책에실린 소설의 많은 부분이 언어 일반에 대한 문제의식과 결합되어 있다. 외국 유학이나 외국어를 배우는 상황(「거짓말 연습」 「폴링 인 폴」「부드럽고 그윽하게 그이가 웃음짓네」)과 실어증이나 언어적 혼란(「감자의 실종」 「꽃 피는 밤이 오면」) 등이 소설 속에서 중요한 장치나상황으로 등장하고 있다. - P252

이런 생각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포착해내고 있는 작가 백수린에게 소설이란 이런 마음들, "언제나 내 안을 둥둥 떠다니는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의 부스러기들"을 표현하는 도구라 할 수 있지않을까. 이렇게 읽고 싶은 유혹을 느낄 만큼, 백수린은 이 소설에서소설쓰기에 대한 상징으로 읽힐 만한 몇몇 장면들을 배치해놓았다. - P262

이처럼 언어의 수행성에 대한 테제로 귀결되는 거짓말 연습의 서사적 성찰이 믿음직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위와 같은 단편적인 구절때문이 아니라, 이 책에 실린 소설 전체가 지니고 있는 서사적 활기때문이다. 언어의 한계에 직면하여 백수린의 인물들은 종종 입을 닫거나 혹은 매우 왜곡된 소리를 내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계기일 뿐이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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