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은 신혼집을 얻기 위해 무리해서 대출을 받았다. 회사에서차로 삼십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전원주택을 샀다. 똑같은 모양의 땅콩집이 수십 채 모여 있는 단지였다. "너무 똑같잖아." 아내의 말에 정민은 입구에 앵두나무를 심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 P163

교도소에 도착하고서야 공휴일은 면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양말은 전해줄 수 있나요? 나는 민원실 직원에게 딸기가 그려진 분홍색 양말을 보여주었다. 교도소에서 신기에는 다소 민망한 디자인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새해 첫날이니까. 막냇삼촌은 틀림없이 웃어줄 것이다. 양말은 반입 금지 품모입니다. 직원이 말했다. - P263

아버지가 말했다. 니가 그나마 가장 가까운 곳에 살잖니. 그 말은사실이었다. 차가 막히지 않으면 사십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나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전 열한시 삼십분이었다. 그럴게요. 제가 갔다 올게요. 나는 말했다. 착하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가 착하다고 하니 이상하게도 착하다는 말이 다시 듣기 싫어졌다. - P263

아버지는 깁스를 풀기 전에 넘어져서 골반을 다쳤다. 막걸리 를마시고 화장실에 갔다가 슬리퍼를 잘못 밟아 넘어졌는데, 어머니가 외출을 하는 바람에 몇 시간 후에야 발견되었다.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목이 쉬도록 사람 살려달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 소리- 옆집까지만 들렸고, 옆집은 할아버지가 허리를 다친 뒤 요양원에 들어가서 비짐이었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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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기로 했다고 한다. - P37

그러면 아버지가 이렇게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이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다. - P37

아버지의 시나리오는 무용했다. 누구도 이유를 물어오지 않았으니 아버지도 어머니도 대답할 기회조차 없었다. 같은 목적을 가진 부부들이 한방에 모여 차례를 기다리다가 이름이 불리면 판사앞으로 나가 이혼을 확정받는 것이 전부였다. 한 쌍도 아니고 네쌍씩 일렬로 서서, 성적표를 받듯 확인서를 받아 챙겼다. 그걸로끝이었다. 오십 년 결혼관계가 그렇게 끝을 맺었다. 낙제점을 받고도 합격증을 챙긴 셈이었다. - P38

이럴 땐 꼭, 느이 아빠구나, 딱 네 아빠야. - P43

넌 네 엄마 인생이, 그렇게 정리되면 좋겠니?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 P43

어머니가 여고 졸업 후 서울로 떠나면서부터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를 벗삼아 술상 위에 펼쳐놓고 술을 마셨다 한다. 한 줄 읽고 한 잔, 두 줄 읊고 한 잔. 그렇게 편지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다보면, 내 어머니가 금방이라도 소주 됫병을 옆구리에 끼고 걸어들어올 것 같다고,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보내는편지에 마지막 인사처럼 덧붙이곤 했다. - P59

‘삼칠일 지나 오니라.
할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 P54

얼마나 재미가 나던지, 참 좋다, 참 좋다, 참 좋다, 계속 그러면서 앉아 있었지 뭐야. 다시 배 타고 나오면서 우리 또 오자 약속했어. 뭐가 그리 좋았는지는 가물가물한데, 그 느낌은 두고두고 기억이 나. 아 좋다, 참 재미나다, 우리 다시 오자. - P48

그냥 같이 삽시다, 명자씨. - P51

골목을 돌고 돌아 집까지 꼬박 열두 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보따리만 이고 지고 다섯 개였다. 전에 몇 번이고 와본 사람처럼 능숙하게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선 증조할머니는 우렁차게 어머니를 불렀다. 명자야, 할미 왔다 명자야. - P53

다시 절을 올리고 서울로 떠나던 날, 할아버지는 그제야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명자야, 하고 불러세운 다음,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네가 저 사람 아버지가 되어줘라. - P61

난 희생한 적 없어. 하루하루 사랑하면서 살았을 뿐이야. 내가할 수 있는 걸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어서. 그걸 하며 살아온 거야. 네가 그걸 그저 희생으로만 생각한다면, 네 말대로 그 모든 게 그저 희생과 인내였다면, 내 인생이 그런 거였다면,
난 정말 슬픈 거 같어.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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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감을 즐기게 된 아이는 친구들 없이도 신나게 자전거를 타며 땀을 흘렸다. 일을 못하리라는 것을알면서도 나는 에코백 안에 책과 작은 노트를 악착같이 챙겨 다녔다. 아이를 위한 물건들 사이에서 책의모서리는 둥글게 휘어졌고 노트의 표면에는 잔 기스가 잔뜩 생겼다. 암담함 속에서 세상은 풍문과 잡음으로 시끄러웠고 이런 날들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나아지긴 할 건지 예측할 수 없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하늘과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어떤 시기에도 아이는 자란다는 것과 어떤 일도결국에는 지나가리라는 사실만이 희미한 위안이 되었다. - P80

소설을 쓰지 않으면 나는 행복할 것인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타인의 행복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나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었다. 소설을 쓰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한 문장이 풀릴때, 이 문장을 만나려고 그렇게 썼다지웠구나, 깨닫게 되는 순간, 들인 시간이나 노력과 상관없이, 가성비 같은 말로는 도무지 설명이나 환산이 되지 않는 희열이 머리에서 발끝으로 흘러내렸다. - P86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그 소설들을 지나왔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정신없이걷다가 문을 연 뒤 다른 세계로 갔고 등 뒤에서 닫히는 문을 보며 한 시절이 떠나갔음을 깨달았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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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맹렬히 사랑스럽게 여전히. 어쩌면 이 글은 너와네 엄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되지 못한 나에 관한 이야기, 결코 되어보지 못한 꿈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 P33

저한테는 너무 당연한 거고 자연스러운 건데, 그냥 생활인 건데, 엄마한테는 안 되는 거구나. 예상은 했는데 그렇게까지 나올줄은 몰랐죠. 세대 차이가 날 수도 있는 거고, 엄마 입장도 이해가되긴 하지만, 이게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 P29

여자친구랑 처음엔 정말 많이 싸웠는데.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해 길거리 주먹다짐까지 장난 아니었어요. 레즈비언 사이에서질투와 구속? 부끄럽지만 그런 경향이 있긴 하죠. 왜 그런지는 몰라요. 사람마다 다르겠죠. - P27

엄마가 되는 대신 개를 한 마리 키웠다. 그 개에게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의사와는 상관없이 교배를 시켜 새끼를 낳게 했다. 네마리 중 둘이 살아남았고, 그중 가장 건강한 아이를 네 집에 입양보냈다. - P25

또다른 단편은 편집증을 가진 여자가 주인공인데, 누가 집에 침입해서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해요.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현실을 왜곡하잖아요. 그런 감정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자메이카 영화 중에 <어려우면 어려울수록>이라는 영화가 있거든요. - P23

약속을 잡았다. 너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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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두 장 반짜리 방 구석구석 아슴푸레한 새벽빛이 스민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진이 선물해준 달력. 한 장 한 장 뜯어쓰는 일력이다. 한 면을 가득 채운 ‘8‘이라는 숫자와 ‘숲‘이라는 한자 아래 ‘라디오 생방송 전화 인터뷰, 오후 5시 35분‘이라고 적혀있다. 실제로 읽을 수 있는 글자는 ‘라디오‘와 숫자뿐이지만, - P201

"잊으시면 안 돼요."
진은 버릇처럼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일력을 뜯어내는 일을 잊지 말라는 건지, 인터뷰를 잊지 말라는 건지 헷갈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 P202

이제 일곱시쯤 되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무렵 라디오에서 시보를 전한다. 다시 눈을 감는다. 졸려서가 아니다. 그러니까 눈을감는다는 것은 눈꺼풀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검붉은 배경 위로 흑점이 떠다닌다. 눈을 뜨고 있을 때도 날파리처럼 아른거리던 흑점들은 눈을 감으니 더 선명해진다. 나이가 들면서 흑점의개수도 늘고 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주위가 차츰 훤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흑점의 배경이 검붉은 빛에서 노을빛으로, 그리고복숭앗빛으로 점차 옅어진다. - P205

그전에 글자를 모를 때도 가게 이름은 알았고, 그리 불편하지 않았으니 세상이 달라질 정도의 큰 변화는 아니다. 그래도 진이 찾아오면서 달라진 것이 있긴 했다. 낱말 카드 대신 진의 곱게 묶어넘긴 머리카락을 보며 내 나이에서 진의 나이를 빼보기도 하고,
진의 나이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헤아려보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 P207

이삼 분 정도 지나면 라면이 알맞게 익을 것이다. 라디오 전화인터뷰 시간은 약 칠 분이라고 했으니 이 기다림의 두 배 정도 되는 시간이다. 질문이 다섯 개니 일 분정도씩 대답을 준비하면 된다고 했다. - P209

본래는 별 관심 없이 흘려듣지만 인천과 여성이라는 말에 귀를기울인다. 정답은 1번 수원이었다. 진행자는 답에 대한 설명과 함께 나혜석의 생애를 들려준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나혜석은 행려병자로 죽었지만 파리며 독일이며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다녔다. - P213

미역을 다듬듯, 내 삶에서 불편한 부분을 걷어내고 보기 좋은부분만 남도록 다듬어 들려주었다. 진은 내 얘기를 듣다 가끔 눈물을 흘렸다. 때때로 진의 눈물이 당황스러웠다. 대체 어디쯤에서, 무엇 때문에 운 건지 내가 했던 이야기를 되짚어볼 때도 있었다. 내 진짜 삶을 들으면 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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