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흘은 날이 맑았다. 창밖으로 멀리 고가도로와 그 위를달리는 자동차가 보였다. 고가도로 앞으로 아파트와 상가 건물,
다세대주택,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있었고 가끔 새들이 푸른 하늘을 무리지어 날았다. 그녀는 피와 진물을 받아내는 주머니를 몸에 달고 링거를 맞으며 병실 침대에 누워 그 풍경을 바라봤다. 겨울이었다. - P87

사흘 뒤부터 그녀는 바퀴가 달린 링거 지지대를 끌고 병동 복도를 걸었다. 누워만 있으면 회복이 더디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부터였다. 그녀는 천천히 걷다, 중간에 휴게실 의자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봤다. 텔레비전을 건성으로 보면서 환자와 보호자, 방문객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 P87

그녀에게 그런 방문들은 뜻밖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다정했고,
그녀가 겪은 고통을 위로했다. 그녀는 잠시였지만 그들에게 정성껏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다. 그 느낌은 수술 후 그녀의 혈관을흐르던 모르핀처럼 부드럽고 달았고, 그녀는 덜 아플 수 있었다.
그들이 한때 누구보다도 그녀를 아프게 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잊은 건 아니었지만. - P88

그녀도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병을 알게 되고,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과정을 짧게 정리해 말했다. 다희는 중간중간네, 그렇죠, 그랬어요? 라고 응답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다희와대화하는 동안 그녀는 익숙한 편안함을 느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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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이 시작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혼자 취리히 거리를 산책했고 자유의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거리 모퉁이마다 연애 가능성이 널려 있었다. - P55

우수 어린 이 이상한 도취는 일요일 저녁까지 지속되었다. 월요일, 모든 것이 달라졌다. - P57

칠 년 전 테레자가 살던 도시의 병원에 우연히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토마시가 일하던 병원의과장이 급히 호출되었다. - P65

그때 그녀의 영혼은 선실에서 기어 나와 갑판 위에서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고 노래를 부르는 뱃사람처럼 육체의 표면으로 솟아올랐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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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아파트는 다른 세계였다. 실버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그냥 노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산다는 것 이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예습이 필요한 일이었다. - P19

난 아무런 준비도 생각도 없이 덜컥 실버의 세계로 들어와 버렸다. 그렇게 좌충우돌, 고군분투의 삶은 시작되었다. 매우 조용히. - P19

하지만 실버아파트를 떠난다고 해서 노년이라는 미래와 현재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나는 ‘실버기‘의 문앞에 선 초보 노인이었다. 3장은 나의 실버기 입문기다. - P11

‘이곳은 실버아파트라 언제 비상사태가 생길지 모르므로 소방차 구역에 주차를 하는 것은 불법이나 이미 사다리를 장착했으니 신속하게 이사하시고……… - P21

할머니는 뒷짐을 진 채 방과 방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매우 즐거워했다. 물론 난 할머니가 왜 즐거운지 그 이유를아직은 알지 못했다. - P23

언제부터인지 오래되고 낯설어진 문장.
우리집에 놀러 와. - P25

"낮잠 시간이라 다들 벨 소리를 못 들으셨나 봐."
"아, 시에스타, 낭만적이네. 스페인 같잖아."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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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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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지만 매섭고 부드럽지만 또렷하다. 더 단단해진 최은영의 작심과 작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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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새벽에 엄마는 할아버지를 깨웠다. 아빠, 너무 이상한 느낌이 들어.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고냄새가 나. 무슨 냄새가 난단 말이니? 냄새가 나 - P170

할머니들은 측량에 대한 감각이 없다. 할머니들은 무한이다.
열려진 존재다. 사랑이 그렇다. 무한정 퍼고 무한정 무치고 아이에게 설악산만한 고봉밥을 내밀고, 할머니 정말 나, 배가 찢어지겠어! 그런데 요즘은 엄마가 그렇게 음식을 퍼준다. - P172

그래서 윤이 나는 것들은 평안해 보인다.
엉덩이 덕에 반들거리는 뒷마루처럼 - P175

아무튼 윤은 시간을 먹고 드러나는 빛, 만질수록 넓게 퍼지는 공평의 빛. 우리의손엔 빛의 입자라도 박혀 있는가. 접촉하면 빛이 난대. 그래서 연인은 계속해서 서로의 얼굴을 쓸게 되는가. 어떤 강아지는 호박보다 반들거리고 어떤 아이들은 보름달보다 이마가 환하고 어떤옹기는 하늘의 별보다 밝게 빛난다. 우리의 눈은 윤기로 반들거린다. - P176

‘아니 씨, 내 인생이 아무리 험해도 여태껏 살면서 엄마 밥 한끼 못 사줘? 어떻게 인생이 이래? 우리 엄마한테도 어쩌다가 밥한끼 못 사주는 인생이 됐어?‘ 약간의 분노와 억울한 감정이 밀려오더라. 그래서 바로 그랬지. 그래 엄마! 오늘 거하게 살게 앞치마 걷고, 가게 문 닫고, 늙은 엄마 손을 잡고, 그 자리에서 차를 몰고 밥 먹으러 갔지. 그런데 가는 길에 이상하게 속이 시원하더라.
이유 없이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더라. - P183

별, 시, 눈, 꽃, 귀, 손, 개, 국, 볼, 종, 빛, 빵.
나는 시 쓰고 동생은 빵을 굽는다. 우리의 직업은 한 글자라서사랑이라네. - P189

갓 구운 빵을 꺼내 슬쩍 쥐어보면아주 뜨거운 사람의 손을 잡은 것 같다. - P193

그렇게 빵과 시는 활기차게 열린 자유다.
눈이 오면 신나게 달리는 강아지처럼.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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