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가 궁궐 초입에 위치한 지도 앞에서 여자를 발견한 것은,
이 소설이 또 묻혀버리는 것은 아닐까 근심하며 내가 샷추가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 P202

리가 킴을 처음 만난 것은 아프리카에서였다. 삶이 전에 없이 만만해 보이던 이십대 후반의 일이었다. - P205

알코올중독자 주제에킴의 처사는 뭔가 모순적인 데가 있었지만, 사실 사랑이 식는데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만은 동서고금의 진리였다. - P209

공연이 끝나면 그들은 불빛에 잠긴석조건물들 사이의 골목을 오랫동안 헤맸다. 한 번도 폐허가되어본 일이 없는 도시. 간혹 그들은 시내 한복판에 있는 대광장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한 시대를 호령한 제국의 수도였던탓일까. 리는 식민지 약탈품으로 가득 채워진 거대한 바로크식 궁전이나 금박이 화려한 대성당 앞에 설 때마다 그 규모에압도되고는 했다. 그것은 대광장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P211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 있고 친절한 친구라는 것을 리누구보다 잘 알았다. 킴과 함께했던 시절, 리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 바로 그런 존재였으니까. - P213

빨리 도시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외국어로 이야기하는 것이점점 귀찮아졌다. 대화가 귀찮아진 것은 킴의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킴의 식구들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리가 알아들을수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럴 때면 리는 마치 대화를 알아듣고 있다는 듯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거실찬장에 전시되어 있는 오래된 식기들이나 서가에 비치된 책의수를 세웠다. - P216

당신이 당신과 상관없다는 듯 리의 한심함을 비웃고 내가무고한 척 리를 연민할 때, 혹은 내가 리의 한심함을 비웃고당신이 리를 연민할 때, 리는 여자를 데리고 궁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가이드의 마지막 코스는 언제나 이 정원이었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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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이. 우리의 딸은 아무데도 없었어. - P171

그런데 있잖아. 당신, 당신도 그런 경험을 해봤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늘어난 자기테이프가 뒤엉키듯, 나는 도대체 아이를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거야. 아이가 정말 나와 함께 아쿠아리움에 가기는 한 걸까? 그곳에들어갈 때 아이와 함께였다는 확신이 갑자기 없어져버려. 아이를 잃어버린 것은 한참 전인데 내가 의식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나는 당신과의 약속에 늦을까봐 허둥지둥 정신이 없었고, 그러고 나서는 당신의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데 온통 정신을 팔고 있었거든. - P179

"아이가 집에 있는 것일까요?"
나는 울상을 지으며 경찰관에게 물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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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에는 보루가 있던 곳에 비석을 세워 두었어요.
번호가 매겨진 보루 터에서 잠시 걸음을 멈춰봅니다. 어느 시대의 누군가에게는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겠죠. 끝까지 지켜 내고 싶은 것들을 이곳에 모아 두고 비로소숨 돌리고 있었을 누군가를 가만히 상상해 봅니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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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에는 보루가 있던 곳에 비석을 세워 두었어요.
번호가 매겨진 보루 터에서 잠시 걸음을 멈춰봅니다. 어느 시대의 누군가에게는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겠죠. 끝까지 지켜 내고 싶은 것들을 이곳에 모아 두고 비로소숨 돌리고 있었을 누군가를 가만히 상상해 봅니다. - P209

산은 보이는 것이 전부죠.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산의 생리를 모두 읽어 낼 수 있어요. 그래서 세 살짜리 아이도 스케치북에 산을 그릴 수 있는 거예요. - P210

내 인생도 그 카페들처럼 이름만 말해도 누가 알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좋아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만만하고 우습게 볼 수 없게 조처해 놓고 싶은 마음이 내안에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저 겁이 많은 사람이었는지도. - P213

통합이 있으려면 그 전에 분리의 시간을 겪어 내야 한다. 조화로움에 닿기 위해서는 균열의 과정을 통과해야한다. 그리움 앞에는 아픔이, 존중 앞에는 미움이.
나는 그 모두가 사랑이라 믿는다. - P216

싫어했으면서. 그렇게 나를 기억하고 알은체하는 곳,
고맙다며 활짝 웃어 놓고 다시는 가지 않았으면서. - P221

보나마나 이번에도 둘 다 본인이 마시려고 샀을 거다.
잠을 깨워 줄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영혼을 데워 줄 캐러멜마키아토 중에 뭘 마실까 결정하지 못하다가 출근 시간임박해 결국 두 잔 모두 시킴으로써 고민을 종결한 그녀. - P225

커피에 관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결국 커피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될 걸 알고 있었다. - P228

음료에 관해서가 아니라 커피에 투영했던 내 모든 것에대한 이야기가 될 걸 알고 있었다. 커피 한 잔의 확보가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거기에 내가 얼마나 의지해 왔으때론 집착해 왔는지. 그러니까 그 작은 음료 하나가 나를 어떻게 구해 줬는지에 관해 쓰게 될 걸 알았다. - P229

아이를 학교에 보낸 뒤 나는 카페를 찾는다.
한 시간여 아이가 곁에 없는 시간, 운 좋은 날엔 30분쯤 카페에 앉아 있을 수도 있다. 오롯이 혼자일 수 있는 완전한 30분의 확보. 카페라테 4,500원은 전혀 아깝지 않다. - P232

내 오른쪽 어깨에 안은 아이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벌써 초등학교 4학년이지만 아직 아기 냄새가 난다. 볼에 난 솜털에 내 코를 비빈다. 순간 나는 실존의 감각을 느낀다.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에 백날 "카르페디엠을 써 놓아도 한 번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현재를누리고 사랑하라는 죽은 이들의 당부가, 비로소 내 안에서 실현된다. - P233

내가 있는 곳의 안과 밖 그 무엇 하나 바꿀 수 없어도,
안과 밖 그 너머에서 내 삶을 잠시 관조할 수 있게 시간을멈춰 주는 커피가, 나를 살렸다.
그러니까 이것은 커피 이야기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앞에 놓인 이것이 커피만은 아닌 것이다. - P235

나를 제외한 모든 승객은 하나의 단순한 사실을 공유하고 있었다. 휠체어가 곧 다리인 사람은 버스에 탑승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시민이라면 누구나 버스에 오를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 P241

최고의 선택이란 건 없어요. 지난날의 어떤 나를 인정할 수 없다느니, 지난날의 어떤 너를 이해할 수 없다느니,
그런 말들도 사실 세상에 없어도 되는 말들인 거예요. 우리는 다만,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며 살았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선생님. 저도 최선을 다해 살아온 거겠네요.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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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수단은 또 다른 수단으로 이토록 쉽게 대체된다. 나는 요즘 디카페인 라테를 맛있게 만들어 주는 카페를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다. - P206

녹차는 내가 타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 P193

집이었다면 아이의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 내 두 다리는 아이를 위한 의자가 된다. 오른쪽 허벅지에 아이의 엉덩이를 올리고 왼쪽 다리로 등받이를 만든다. 내 왼팔 전체로 아이 어깨를감싸 고개를 지탱시킨 뒤 오른팔을 바닥에 둔 밥그릇 쪽으로 뻗는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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