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 인물, 그게 문제가 될까?
차인석이 묻자 규한이 목소리를 높였다. - P233

석주가 조심스레 우려를 표하자 규한이 말했다. - P233

석주는 망국의 밤」의 출간 과정이 순탄치 않으리라고 직감했으나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얼마간 바꿔놓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 P234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모조리 고쳐버리면 그 글은 뭐가 되는 겁니까? 논란을 피하겠다고 원고를 누더기로 만드는 게작가를 위하는 건 아니지요. - P240

오늘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래요. 이 원고는 이제 홍선생 것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 P242

서로를 원망하진 않았다. 언쟁하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누군가의 대역을 수행하는 것처럼 덤덤했다. 모든 게 너무나 조용하고 매끄러워서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조차 실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고마웠다는 인사와 잘 지내라는 말을 형식적으로 건네면서도 석주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원호가 듣고 싶었던 말인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말인지도. - P251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석주는 늘 했다. 이따금 부담감으로, 압박감으로 돌변하곤 하던 그 기대를 놓은 적은 없었다. 그녀는 현실이 아니라 허구를 탐독하고 완성하는 데 많은시간을 할애했다. 그래서 일상을 돌보는 데 서툴렀고 힘껏 붙잡아야 할 것들을 그냥 흘려보냈다. 그날, 석주는 처음으로자신의 삶을 냉정하게 돌아보았다. 그것은 닮은꼴의 하루가반복되는 진부한 이야기 같았다. 극적인 사건도, 놀라운 반전도 없는 서사, 개성도 매력도 없는 주인공이 완성해나가고 있는 그 스토리는 어떤 독자에게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할것 같았다.
그럼에도 먹먹함이 밀려왔다. - P263

석주는 낯익은 그 모습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제야 오래전선배들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떨림과설렘, 서투름과 투박함, 선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마음. 한번시작하면 멈출 수도, 그만둘 수도 없는 백지와 같은 자신의삶에 높이와 깊이를 만들고 명암을 부여한 바로 그것. - P271

책을 좋아하나요?
목소리에 감출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났다. 맞다. 그건 오래전 사랑이 시작된 줄도 모르고, 그것이 삶을 얼마나 바꿔놓을지도 모른 채, 그저 속수무책 그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던 석주에게 누군가 건넸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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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출간되어 한 부 보냅니다. 선생님이 살아 계셨으면 참흡족해하셨을 것 같네요. 고생 많이 했습니다. - P99

장선배가 사수였던 장민재를 가리킨다는 걸 석주는 한참만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에게 이 회사에 지원한다고 알린적이 없었다. 그저 서유화의 책을 받은 뒤 짧은 감사 메일을쓰면서 이 일을 조금 더 해보고 싶다고 말한 게 전부였다. - P103

문학책? 어떤 문학책?
오래 기억에 남는...... 그러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우, 움직이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 P105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석주는 아버지가 두고 간 지폐를보았다. 구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새 만원권 지폐 스무 장이전날 아버지가 무심하게 훑어본 책 사이에 끼여 있었다. 그녀는 그 돈을 아끼는 몇 권의 책에 부적처럼 나눠 끼워넣고 오래도록 쓰지 않았다. - P111

글자들은 서로 다른 자간과 행간 속에 알맞게 자리했다. 각기다른 세부를 통해 고유함을 부여받은 책들은 자신만의 유일한 모습으로 빛났다. 그 사각의 형태는 언어를 담기에 가장완벽한 형식처럼 보였다. - P113

석주는 그곳이 주는 소속감이 좋았다. 그곳의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속도로, 닮은꼴의 꿈을 좇는 듯 보였다. 그들의목표는 추상적이고 유동적이었으나 그래서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석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 P121

장점이 많은 원고인데 제 말이 투박하게 나간 것 같아요. - P127

책에 관해서라면, 글에 관해서라면 빈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석주는 그의 정중한 답신에 용기를 얻었다. 그녀는 장민재의 그런 고지식함과 한결같음을 존경했다. - P134

아니, 그들조차 의식하지 못한 순수한 열정이 다가와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경청하고 있는 것 같았다. - P141

석주가 아는 사랑은 문학을 통해 배운 것이어서 비현실적이고 불완전했다. 그녀는 사랑이 한 사람의 삶을 전복시킬 수있음을 알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다. 사랑은 그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주어지는 특권 같았고, 허구의 형식 안에서만 존재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기도 했다. - P144

책이 독자에게 가닿는 과정은 길고 복잡했다. 배본사와 도매상, 총판과 서점 등 여러 유통 단계를 거치는 동안 책값은수시로 달라졌고, 판매 수량을 예측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품과 외상 거래가 관행처럼 굳어 있었다. - P153

다정하고도 필사적인 그 산책은 일 년 넘게 이어졌다. 그시기, 두 사람이 함께 걸어서 다다를 수 없는 곳은 존재하지않았다. - P163

다만 그런 순간엔 그의 관심이 환한 곳이 아니라 어두운 곳으로, 이기는 쪽이 아니라 지는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석주가 결코 알 수도, 닿을 수도없는 그의 내면의 그늘 같았고, 그녀가 다루는 문학의 세계와도 얼마간 닮아 보였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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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이주인. 연애 좀 살살 하지-주인(민망한) 공유라. 너나 그림 살살 그려-갈수록 수위가 그냥 아우....... - P9

반찬으로 나온 고추로 시범을 보이려는 주인과 말리는 친구들. 창피한데 웃기고 미치겠다. - P13

쇼를 위한 온갖 잡동사니들이 나뒹구는 거실 한복판. 마술사 복장을 한 해인 10세, 남이 똘망똘망 빛나는 눈으로 자기눈알을 뺐다 넣는 식의 마임을 선보인다. 다들 "오오-"
하며 추켜세우는 분위기. 이어 해인은 손끝에 쥔 동전을 이리저리 옮겨본다. - P17

주인그래, 트라우마. 뭔 소린진 알겠는데-(웃음) 뭔 씻지 못할 상처에,
인생이랑 영혼까지 막 파괴가…………0아니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표현도 어디서 복붙한 것처럼- - P39

주인(버럭) 그래! 나도 성폭행 피해자다!! 어쩔래?!
그래서 뭐? 내 인생 막 완전 망가진 것 같냐?
나 아주 끝장난 것 같아? 그래?! - P41

요리가 담긴 도시락을 배불리 먹은 세 사람. 미도와 주인은 옛날 사진들을 보고 있다. 여러 태권도 대회에 나가 메달을 딴 청소년 미도와 막 태권도를 시작한 어린이 주인의앳된 모습을 보며 깔깔거리는 두 사람. 대한은 즐거워하는둘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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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창에 커서를 갖다 놓았다. 미루고 미루던 일이었다. - P127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자판을 두드렸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모두 그 안에 있을 것 같았다. 성. 폭. 력. 벌써 몇 번이나쳤다가 지워 버린 단어였다. 엔터 키 위에서 손가락이 망설인다. 그 키만 누르면 내가 겪은 일들이 영화처럼 펼쳐질 것같다. 볼 자신이 없다 - P129

어린 시절 성 학대를 당한 경우, 대개 심리적 억압이나 해리를통해서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청소년기에 기억이 되살아나고통을 당하거나 혹은 뒤에 성인기에 와서 이성과 친밀감을 느끼는 순간 기억이 되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 P131

"그때...………, 니네 엄마는 너한테 어떻게 했니?"
나는 그동안 목에 걸려 있던 말을 토해 냈다.
"그 사건 일어났을 때?" 아니다. - P139

감옥에 갔다 나와서 이민을 갔다고? 아이들한테 그런 짓을 했는데 어떻게 감옥에서 나올 수 있지? 그놈이 외국에서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을 걸 상상하니 억울해서 숨이 막히는것 같았다. 큰유진은 그놈을 용서한 걸까? - P141

"우리 큰아빠가 시인이시거든. 문학 모임에 가서 술을 마시는데 누가, ‘야, 노을 곱다!‘ 했더니 다른 시인이, ‘아, 술맛떨어지니까 일 얘기 하지 맙시다.‘ 그러더래." - P147

엄마가 피해자 부모들과 함께 소송 준비하는 것을 안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무슨 자랑거리라고, 집안 망신시키는 줄도 모르고 나서느냐고 했단다. - P165

"회장님, 이 애가 전교 1등을 했다네요. 이제 제 몫은 할것 같으니 마음 푸셔요."
내가 1등 했을 때 할머니가 할아버지 사진에 대고 한 말이다. 내가 그런 일을 당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도그 일을 만회하기 위해 빚쟁이처럼 산 것이다. - P170

요즘 형진이는 내가 없을 때면 ‘야동‘을 보는 눈치다. 내동생이 야한 동영상을 본다고 생각하면 징그러웠지만 형진이 잘못만은 아니다. 나 역시 무심코 메일을 열었다가 달려들 듯이 펼쳐지는 음란물을 어쩔 수 없이 본 적이 있으니까.
한참 호기심이 많은 아이한테 쫓아다니면서 보여 주겠다는데 눈 감고 있지 않았다고 야단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P180

다시 그 일을 기억해 내는 일이란 이미 아문 딱지를뜯어내고 안의 상처를 보는 일과 같을 것이다. 다 나은 줄알고 있던 상처가 딱지 속에서 곪고 있을지도 모르고, 언젠가 전쟁 영화에서 본 것처럼 구더기가 득시글거릴 수도 있다. 그걸 들여다봐야 하는 작은유진이는 결코 뒷면이 비어있는 종이 인형 같은 존재가 아니다. - P184

언니는 내 어깨를 툭 쳐 주곤 일어나 연습실에서 나갔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나는 세운 무릎을 끌어안았다. 내가 나를 안아 주는 방법이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때 나는 그렇게 나를 안는다. 언니도 얼마나 사랑받고 싶었으면 스스로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냈을까.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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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위도에 위치한 지대에는 하지를 전후한 몇 주간에 걸쳐 해질녘 어스름이 길고 푸르러지는 시기가 찾아온다. 이 푸른 밤은 이 책에서 이야기될 시간의 많은 부분 동안 내가 살았던, 강렬한 빛과 함께 해가 저물면서낮이 끝나버리는, 아열대 캘리포니아에는 없고 지금 살고 있는 뉴욕에는 있다. - P7

이 책의 제목을 ‘푸른 밤‘이라 붙인 것은,
쓰기 시작했을 당시 내 마음이 갈수록 질병, 약속의 종말, 남은 날들의 감소, 쇠락의 불가피성, 빛의 소멸을 향해 다가가고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푸른 밤은 빛의소멸의 반대인 동시에 그 경고이기도 한 것이다. - P9

2010년 7월 26일.
오늘은 그 아이의 결혼기념일이었을 날이다. - P10

모두 다 그 아이의 선택이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들인 감상적인 선택들이었다.
나 또한 기억하는 것들이었다. - P11

감상적인 선택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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