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하, 웃었고 이모는 호호, 웃었다. 우리는 비밀암호로 상대를 확인한 병사들처럼 안심하고 팔짱을 꼈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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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결혼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제발 부탁이니, 누구도 비난하지 말기를 바란다. 여자 나이 스물다섯에 할 수 있는 결단이 꼭결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P217

미리 말하지만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하는 특별사유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다 통용되는 앞서의 세 가지 사랑 메모와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 사랑을 가려냈다. - P218

그래도, 사랑의 유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보다 나은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이 욕망을 멈출 수가 없다. 이것이 사랑이다. 김장우와 함께 떠났던 서해바다에서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그장렬한 비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누추한 나는 너무나 부끄러운 존재였다. 부끄러움을 누더기처럼 걸치고 그토록이나 오래 기다려온 사랑 앞으로 걸어 나가고 싶지 않다. 저 바다가푸른 눈 뜨고 지켜보는 앞에서는 더욱. - P219

그렇게 해서 진모는 늦어도 다음 겨울이면 집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어머니도 법률책을 떼고 다시 일본어 공부로 돌아왔다. 진모 때문에 어머니가 일껏 익혔던 "모오 소로소로 아끼데스네 (벌써 가을입니다)"는 써먹을 수가 없게 되었고 대신
"모오 소로소로 후유데스네 (벌써 겨울입니다)"가 도입되어야 했다. - P226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 P228

갑자기 이모부는 왜냐고 눈을 크게 뜨는 이모.
"아니, 이모부랑 같이 간 것 아니에요? 그때가 언제더라? 결혼20주년 기념으로 두 분이 유럽여행 가셨잖아요."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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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데나 장우씨 좋은 곳이면 나도 좋아요." - P190

그러나 다시 붉은 황토밭들이 나타나고 육지의 마을들이 차례차례 스쳐갔다. 나는 바다를 잊을 수 없어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의 모든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과거를 버릴 수 없는 것인지도 - P191

세속의 도시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침대는 정신보다육체를 더 많이 요구하는 침구라는 것이었다. 특히 숙박업소의 침대는 더욱 그랬다. - P192

나영규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확실히 김장우에게는 있었다. - P194

어쩌면 김장우도 충분히 주위의 시선을 고려한 뒤에 내 이마에 손을 얹었을 것이라고도 짐작했다. 사랑해, 라고 말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참 그렇게 앉아있었다. 나는 밖을 보고, 그는 나를 보고. - P198

돌아와서 모텔 옆 나이트클럽에서 양주를 마셨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또 김장우의 빈약한 지갑을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소주로! 소주로 마셔요. 섞어 먹으면 안 좋아...………."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김장우가 알려주었다. - P202

아, 나는 전율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대사였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난동을 부리던 그날 밤, 아버지가 말했었다. 당신은 나를 가두는 간수 같았어, 당신은 몰라, 그 절망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 P205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하는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보장하는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 P208

유행가는 한때 유행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시작한사람들에게 대물림되는 우리의 유산이다. - P209

나영규라는 남자, 이토록 못나게 생긴 나 같은 여자를 사랑하겠다고 마음을 먹다니, 고맙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고마움도 사랑이라면.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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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것도, 버린 것도 흔적으로 읽힐 수 있다. 물론 정작본인은 자신이 무엇을 남겼는지 모를 테지만. - P15

아니요. 우아하고 완벽한 글은 없어요. 대신 우아하고 완벽하게 글을 낚을 수는 있죠. 낚시처럼. - P16

말하자면 대나무 숲 같은 것. 대나무에는 이름이 없다.
비밀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비밀에 이름이 생기면 노출되기 마련이다. - P19

내가 이 도시에 온 것은 데이터를 초기화하기 위해서다. 6년 동안 사귀었다가 헤어진 사람과의 추억이 전혀없고, 동이 씨의 부석부석한 얼굴이 보이지 않고, 매일이 삶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찾으려고 발버둥 치는 내가없는 곳. - P22

나와 이름이 같았다. 같은 이름을 만나면 내가 몇 개의 나로 갈라지는 혹은 과거 혹은 미래의 나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그게 무엇이든 지금의 내가 아니라는것은 확실하지만. - P28

전혜린 좋아해요?
남자가 물었다.
누구요?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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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에게 여행이란 낯선 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다른 고장에는 다른 물이 있단다. 낯선 풍경은 두려워해야할 필요가 없지만 낯선 물은 위험할 수 있지. - P10

경계 자체가 물로 되어 있다면, 낯선 물이 시작되는 지점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일까? - P11

내 주위에서 나지막하게 속삭이던 목소리들이서로 겹치면서 커져갔다. 배 위에서는 모두가 소박한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다. 마치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누구인지잊어버린다는 듯이 말이다. - P13

모스크바는 나에게는 결코 도착할 수 없는 도시였다. 내가 세 살이었을 때 모스크바 예술 극단이 처음으로 도쿄에 와 공연을 했다. 우리 부모님은 체호프의 <세자매> 입장권을 사기 위해서 한 달치 월급의 절반을 썼다. - P21

열차 승무원은 삼 년전 밤에 열차 문을 화장실 문으로 착각하고 열었다가 기차에서 떨어진 어떤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형제는 특별비자를 얻어서 지역 열차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P25

나의 지구는 낯선 고장들이 폭죽처럼 번쩍거리는 밤하늘 같았을 것이다. 확실히 둥글지는 않았다. - P29

아이가 화덕에 눕혀졌을 때 아이의 심장에서 불꽃이 나와서, 마치 불새가 마을에 내려앉은 것처럼 마을전체가 환해졌다. 불꽃 속에서 불의 여신이 보였다. 여신은 아이를 두 손으로 안고, 함께 빛 속 깊숙이 사라졌다. - P35

나는 깨달았다. 내가 유럽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 P37

그 여자와 연필 사이에 있던, 나에게 낯설어 보인 관계의 바탕에 놓여 있던 것은 바로 독일어였다. 독일어로 말을 할 때 연필은 그 여자에게 대들 가능성을 품고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연필을 다시 자신의 통제하에두기 위해 연필에 대고 욕을 퍼부을 수 있었다. 연필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묵묵히 견뎌야 했던 반면 여자는 연필에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여자가 가진 권력을보여준다. - P43

나는 나에게 언어를 선물해준, 독일어로 여성 명사인 타자기를 말엄마라고 부른다. 사실 이 타자기로는 타자기 안과 그 몸 위에 지니고 있는 부호들만 쓸 수 있었다. - P46

누구에게나 태어날 때 고유한 원본 텍스트가 주어진다는 기본 생각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이 원본 텍스트가 보존되는 장소를 영혼이라고 부른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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