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위에 쌓아올리는 게 아니라 삶 아래로 뿌리를 내리듯 내려가는 글, 제자리를 돌면서 천천히 파고들어가는글, 그리하여 내 안으로 점점 더 깊이 향하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작가의 말‘에서

몰라, 그냥 사주고 싶어. 엄마한테 잘한다며 - P12

그때 나는 내가 면제받은 처벌의 수위가 궁금한 나머지 만약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는데, 엄마는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더니 이내 한결 가벼워진말투로 그땐 마음이 지옥이 될 거라고 했다. 지옥이 되는 걸홀로 감당해야 한다고 했다. - P18

그때였던 것 같다. 어쩌면 영묵씨도 나와 같은 걸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기쁨에 사로잡혔던 순간. 어째서 영묵씨와 눈이 마주치면 마음속에서 새떼가 일제히 날개를 퍼덕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지, 어째서 영묵씨가 뭔가를 물으면 배가 조여오는 듯이 긴장되는지 가만히 생각해보게 된 순간. - P27

[자책도 후회도 안 했으면 좋겠다. 행여나 니가 그런 걸 해서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어.] - P29

그 순간 나는 영묵씨가 잘해줄 때마다 속절없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내 마음은 한 번씩 지옥이 된다고, 그때 나는 영묵씨를 앞에 두고 나 자신에게 백 번이 아니라 천 번을 물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간의 사정을 알리가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엄마에게 차마 얘기할 수는 없었다. - P33

그럴 린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내가 잘못되면 다시 만나도 돼.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어.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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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새로운 지식이 생산된다. 과학자는 실험을 반복하고,
글쓴이는 쓰기를 반복한다. 프로 운동선수나 세계적인 예술가들은 연습을 거듭한다. 연습을 훈련이라고 하는 이유다.
거듭하는 연습을 훈련이라고 하는데, 이는 몸에 익을 만큼되풀이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위대한 운동선수나 예술가의영광을 보지만, 사실 그들의 영광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연습한 몸의 결과다. - P157

연습이 예술(art, 기술)이다. 공부는 쓰기가 연습이다. - P157

‘다른 이야기‘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 창의적인 이야기는 쓰기의 계속적인 실패를 통한 모색에서만 가능하다. 공부는 하는 것이 아니다. ‘노가다‘, 가되는 것이다. - P159

남자 교수가 주를 이루는 식물분류학계에서 지도 교수님은 딱 둘 있는 여자 교수 중 한 분이셨다. 학부와 석사, 첫번째 박사 과정을 지도 교수님 아래에서 보내지 않았지만 그때도 교수님을 알았다. - P162

이 할아버지 과학자가 평생에 걸쳐 연구를 함께한 모두를 꼼꼼하게 떠올리고 긴 시간을 들여 글을 써 내려갔을 모습을상상하니 무척 뭉클했다. - P173

SNS에 이런 이야기를 풀어놓은 적 있는데, 이에 대해《흰머리 휘날리며》의 저자 김영옥 선생님은 "죽음은 시간과무관한 사건이고, 나이 듦은 철저한 시간의 현상"이라고 정리해 주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이와 무관하게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해서는 떠올리면서도 점차 진행되는 나이 듦의 시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아직 나의 일이 아닌 것으로 여겼다. - P185

나는 스쳐 지나가는 낯선 사람의 말 속에서 내가 모두경험할 수 없는 인생사를 듣는다. 그 순간 그들은 오디오 북이 된다. 내게 들어온 이들의 말이 내게서 사라지기 전에 기록한다. 나의 기억력도 시간이 갈수록 흐릿해질 것이니 기억력이 좋을 때 부지런히 들어 둬야겠다. - P199

누구나 구전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내가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무대는 대체로 택시, 병원, 식당이다.
병원에 입원했거나 가족의 보호자로 온 사람들, 택시 기사들, 식당 주인들이거나 노동자들이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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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에 작곡한 모차르트 같은 이들을 제외하면, 대개지식 수준은 헌신한 노동의 시간과 질에 의해 결정된다. 사유 자체가 중노동이다. 획기적인 문제의식은 노동의 산물이다. 여기에 선한 마음이 더해진다면 인간의 기적이요, 공동체의 축복이다. 공부를 잘하는 방법? 지적으로, 정치적으로빼어난 글을 쓰는 방법? 득도 수준으로 몸을 훈육하는 것이첫 번째다. - P151

밀스가 좋아한 용어인 ‘기예(craft)‘는 세 가지 조건을 함축한다. 외롭고 지루한 노동, 완성도에 대한 비타협성, 창의력. "기존의 집단 문화에 저항하라.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방법론자가 되자.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이론가가 되고, 이론과 방법이 지식(craft)을 생산하는 실천이 되도록 하자." - P151

댓글, 혐오 발화나 키보드 워리어의 ‘긴 글‘, 블로그의 ‘편안한 글‘ 등이 쓰기로서 공부와 거리가 있는 것은,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아무 말 대잔치"는 아무 말이나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논리가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논리란 ‘논리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말의 맥락,
상황, 적절성, 연결, 성장, 확대, 넘어섬 등을 의미한다. - P154

생각과 읽기가 공부의 주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수학처럼 좋은 사례도 없을것이다. 남이 풀어놓은 것을 이해하는 능력(읽기)과 자기가직접 푸는 능력(쓰기)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수학 점수가안 오르는 지름길이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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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나를 비난했다.
"안마 일 오래 하셨다면서요. 그런 것도 몰라요? 안마 헛배셨네." - P232

수선하기우여곡절 끝에 호텔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저녁 아홉 시였다. 버스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몸은 무척 피곤했다. - P91

그러자 온 가족이 짠 것처럼 "당연히 도와야지!" 하고 합창했다.
그 상황이 뭉클했다. - P93

나는 눈먼 어머니의 교육관을 듣고 감동했다. 그녀는 기회만있으면 아이들을 데리고 외국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비록 자신들은 캄캄한 세상에 살지만 아이들만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살길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건강한 부모였다. 나는 눈먼 부모를 가진 자매가 부러웠다. - P94

베트남 나트랑에 도착한 때는 새벽 두 시였다. 다섯 시간을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기상해 호텔 로비에서 로컬 가이드를 기다렸다. 11월의 나트랑은 한창 우기였다. 아침 기온은 서늘했고 물기 머금은공기가 묵직했다. 새벽부터 시끄럽던 오토바이 경적이 잠잠해져 있었다. 출근 시간이 지난 까닭이었다. - P97

"언니는 꿈을 이루고 사네요.‘
" - P100

그는 작은 목소리로 "유어 드링크." 하고 내가 두고 온 맥주와음료를 슬쩍 가져다주고 갔다. 뭉클했다. 내가 장애인이기에 받을수 있는 배려였다. 이런 뜨거운 차별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비주류로 남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03

유난히 하루가 길고 지치는 날이 있다. - P105

그때였다. 기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이온 것이다. 기장은 방송으로 난기류 구간임을 알렸고 승무원들은기내 서비스를 중단했다.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방송이 연신 나오고,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갑자기 솟구쳤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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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에게

서로를 운명이라고 부르는 커플을 만났어요. 둘은 종교가 달라서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에서 결혼을 하기 위해 도망 중이래요.

당신의 코흘리개

렌틸콩 수프를 끓이기로 했어요. 소년이 감기에 걸렸거든요. 내가 감기에 걸릴 때마다 나나도 렌틸콩 수프를 끓여주었죠. 나나가 남긴 요리법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나는 떠나지 말았어야 해요. 피란 같은 건 가지 말았어야 해요. 나나와 조로를 뒤로하고 떠나지 말았어야 해요.

조로를 묻어 주었어요.

나는 의적이 되지는 못했지만 지금 검은 옷을 입고 있어요. 조로가 아직 빠르고, 내가 아직 한 가지 검정색밖에 몰랐던 그때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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