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태어나는 중인 고백처럼. - P54

하나의 알은 하나의 완전함이며 흐르기 전의 눈동자다. 그렇기에 껍데기를 깸으로서 알의 세계를 침범하려는일은 불온하고 죄스럽다. 계란을 깰 만한 적당한 모서리를가늠하며, 이종의 도형을 가르고 들어가 그 속을 마주할 자격을 묻는다. 지금 이 테두리를 부수지 않는다면 알은부화할 것인가. 안쪽부터 썩어들 것인가. - P51

계란을 쥐어본다. 피부와 닮은 껍데기의 색이 손안을채운다. 이 나름의 견고함을 부수어 마음이라 여기던 것에몸을 만들어줄 것이다. - P52

속수무책과 엉망진창.
때로 여름은 이 두 단어를 완성하기 위한 계절 같다. - P56

퍼져나가는 달콤함. 복숭아를 생각하면 조금만 스쳐도 멍들 준비가 된 육체 같고 언제든 손목을 타고 흐를 소문 같아서 극도의 예민함과 자포자기의 마음이 한꺼번에밀려온다. 가느다란 솜털을 잔뜩 세우고 웅크린 작고 유약한 짐승. 아름답거나 무너지거나. 완벽하거나 망가지거나.
두가지 선택지만 있다는 듯이. 복숭아의 이분법에는 완벽주의자들의 강박 같은 단호함이 느껴진다. - P57

언니, 그 이후로 나도 물복이 좋아졌어요. 진심으로 엉망과 진창을 사랑하기로 했거든. - P59

짓물렀다는 건 너무 길게 머물렀다는 뜻일까, - P63

층층과 겹겹. 차곡차곡 쌓아올린 생각의 단면. - P66

To toss or to stir up.
가볍게 섞고 휘저으며 소용돌이치는 모양으로 - P74

라따뚜이를 만들다보면 신은 무척 열성적인동그라미 매니아, 항성 수집가였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밖에 없겠다. 겹쳐지며 뜨거워지는 이 작은 소용돌이가 안드로메다 은하처럼 오븐 속에 잠겨 회전할 때. - P80

그건 꽃에게서 문법을 배워 여름에관여하고자 하는 오래된 놀이이자 겨울 첫눈에 미리보내두는 초대장입니다. - P83

보름에서 반달로, 반달에서 초승으로, 초승에서 그믐으로.
양파를 썰어 희고 연약한 낮달들을 연이어 발굴하는일은 맵고 또 달다. - P96

시선을 막는 글자의 방패. - P105

헤아리고〔料] 다스린다[理]는 요리의 핵심은, 다루는재료의 물성을 조심스럽게 파악하여 그 본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다독이는 것에 있다. - P107

기다림도 연습해야 실력이 늘어난다. 와시다 기요카즈鷲田淸—는 그의 저서『기다린다는 것불광출판사 2016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 어쩔 수 없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고 단지 가만히 있을 수밖에없는"20면 것들을 마주해 단념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때 기다림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기다림은 미래를 향해 자신을 열어두는 일이며, 무언가 찾아올 수 있게 내 안에 공간을 만드는 실천이라는 것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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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마음속에 나무를 심었다 - My Dog’s Diary
권남희 지음, 홍승연 그림 / 이봄 / 202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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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웃기고 너무 슬프고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다 권남희 작가님이 세상 모든 반려인들에게 건네는 가슴 찡한 나무와의 시간들 순간들 그리고 사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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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된 강아지야. 언니 종교도 없는데 이제 맨날 나무한테 빌어야겠다! 언니가 시도 때도 없이 불러서 피곤하겠지만 하던 대로적당히 씹어. 나무야, 우리 가족이 돼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네게도우리가 좋은 가족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늘 무덤덤해서 표현은 별로 안 했지만, 너도 사실은 언니랑 엄마 엄청 사랑했지?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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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짓는 슬아의 가슴속에 하나의 문장이 조용히 떠오른다.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슬아에게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진리 중 하나다. 사람들이 좋은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계속 쓸 수 있겠는가. - P294

나오든 말든 소설이니까 상관없다고 웅이는 생각한다. 어떻게 등장하든 그것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웅이에게 소설은거짓말 모음집 같은 것이다. 거짓말들을 모아 진실을 가리키는장르가 소설이니 말이다. - P302

슬아와 아이는 글을 마저 읽는다. 가족의 유산 중 좋은 것만을물려받을 수 있을까.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그들로부터 멀리 갈수 있을까. 혹은 가까이 머물면서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로에게 정중한 타인인 채로 말이다. 아가 아직 탐구중인 그일을 미래의 아이는 좀더 수월히 해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앞자리에 앉은 남자아이가 하품을 하며 슬아에게 질문한다. - P307

작은 책 한 권이 가부장제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무수한 저항 중 하나의 사례가 되면 좋겠습니다. 길고 뿌리깊은 역사의 흐름을 명랑하게 거스르는 인물들을 앞으로도 쓰고 싶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 맺는 가족 이야기만큼이나가족으로부터 훌훌 해방되는 이야기 또한 꿈꾸고 있습니다. 사랑과 권력과 노동과 평등과 일상에 대한 공부는 끝이 없을 듯합니다. 이 공부를 오래할 수 있도록 길고 긴 세월이 제게 허락되기를 소망합니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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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을 살아도 내가 네 마음을 모르네. 나무야. - P123

심지어 오늘은 "할아버지네"까지 들었다.
솔직히 우리 눈에도 나무가 암컷으로 보이지 않긴 하지만, 이렇게100퍼센트 확률로 수컷으로 보다니. 나무야, 가을에는 예쁘게 하고다니자. 할아버지는 진짜 충격이었다. 물론 할머니라 해도 충격이겠지만…………. - P132

그것만으로도 뽀돌이는 행복한 견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언니는 뽀돌이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언니뿐만 아니라, 안타깝게 반려동물 보내신 분들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호자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아이의 운명이었다. - P137

다음 날 도착한 당근 님의 택배에는 구입하지 않은 코텍스까지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메모가 있었다.
애가 아프더라도 귀찮아하지 말고 잘 보살펴주세요.
보내고 나니 못해준 것만 생각나더라고요.
아, 또 울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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