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웃기 시작했다.
"뭔데요, 어머니?"
"아니, 자꾸 웃음이 나네."
나도 자꾸 웃음이 났다. - P116

오랜만인데도 전화를 받자마자 금세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특이하거나 개성적이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평범한 음성이었지만, 아, 하고 2, 3초 만에 알아들었다. 그의 목소리 속에 미묘하고 독특한 머뭇거림이 실핏줄처럼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음색은 순간적으로 내 시간을 정지시켰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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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과 나의 의문은 급기야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닿았다. 일찍이 루소는 태초의 대지에 말뚝을 박고
‘이 땅은 내 땅‘이라고 외친 사람을 소환하며 이렇게 썼다. - P90

대지에 이름표를 붙이고 "여기는 내 땅"이라고 말할 생각을 대체 누가 했단 말인가. 그것은 마치 공기를 한 움큼감아쥔 다음 병에 넣어서 "이것은 내 공기이니 돈을 내는사람만 숨을 쉴 수 있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 P91

탈호칭은 서로의 의견을 거침없이 말하도록 부추겼는데, 그건 대개 다툼으로 이어졌으니까. 사실 막내인 나는 탈호칭의 최대 수혜자였지만 다툼이 시작되면 얘기가달라졌다. 뭐랄까, 그동안 편하게 대화하면서 무덤도 함께파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 P98

왜소한 몸만큼이나 마음도 쪼그라들었던 학창시절에도 박소영하고만 대화를 나누면 어쩐지 좀 커진기분이 들었다. 박소영은 모두가 나를 의심할 때도 나를 믿어주고, 내가 나를 의심할 때도 나를 믿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박소영보다 네 살이나 어렸지만 우리는 진짜
‘친구‘였다. - P98

어느 날 수영이 내게 "동네 고양이를 돌보는 이야기는더 이상 SNS에 올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무슨 소리냐고 되묻자, 수영은 SNS는 계정 주인의 공간이지만 그게시물을 보는 사람들의 공간이기도 하다고 대답했다. 무슨말인지 즉각 이해했다. 동물 돌봄 활동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올리는 것은 자칫 모두에게 "지금 당장 활동에 나서라"고 촉구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니까. 물론 내게 그럴 의도가 없다는 것은 수영이 더 잘 알고 있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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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윌리엄 해즐릿의 에세이를 극찬하면서도 "최고 중의 최고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했는데, 나는 해즐릿의 에세이가 최고 중의 최고 레벨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울프가 꼽은 장점에 대해서는 두말없이 동의하고, 단점으로 지적한 "분열적이고 불협화음적인 면조차내게는 대단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 P11

내가 해즐릿을 만났더라면 "우리는 잘 아는 사람을 좀처럼 증오하지 못한다"라는 그의 신조에 근거하여 그를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즐릿이 죽은 지 백 년이 흘렀으니, 그의 글이 지금도 선명하게 불러일으키는 반감을극복하려면 인간적으로나 지적으로 얼마만큼 그를 잘 알수 있는가가 관건일 것이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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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찾은 두 번째 방법은 통화였다. 휴대폰만 손에 쥐고 있으면 누구도 우리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까 휴대폰은 우리가‘평범한 현대인‘이라는 표식이었다. - P41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입시를 준비할 때만 해도 여러 대학에서 수험생에게 화장하지 않은 민낯을 요구했다. 우리는 실기 시험을 치르기에 앞서 얼굴 검사를 받았다. 진행 요원은 물티슈를 들고 와서 대기 중인 학생들의 얼굴을 일일이 문질러 닦았다. - P50

멀쩡한 옷을 입고 입술도 좀 찍어 바르라조언했고, 나는 그들의 편협한 사고에 힘만 보태줄 뿐인걸알면서도 한동안은 그렇게 했다. 그들은 화사해진 내 얼굴에 반색했고 더 쉽게 훈수를 뒀다. 타인의 무례를 상대하는데 필요한 건 화장품이 아니라 그들의 눈을 가만히 응시할수 있는 단단한 내면이라는 걸 어렵게 배웠다. - P52

그러나 지키고 싶은 존재가 있는 사람은 그럴 수 없다.
간절하게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이 늘 약자다. 입을여는 순간 괜한 시비에 말려들 것을 알면서도, 상대방을완전히 이해시키거나 설득하지도 못할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입을 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발적 패배자가 되고마는 것이다. - P62

이번 이사에서 가장 눈여겨본 건 집의 내부가 아니라해당 건물 세대수였다. 세대수가 적을수록 경비 아저씨나관리실 직원의 눈에 띌 확률이 높아진다는 게 우리의 결론이었다. 사실 부모님이 함께 거주한다는 오해를 받는 건문제가 아니었다. 진짜로 조심해야 하는 건 우리 자매가 이동네 열혈 길고양이 돌보미라는 사실이었다. 무엇이든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되는 세상에서, 문제 삼을 거리를 제공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 - P82

이 결말엔 어쩌면 우리 자매의 단단한 비판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갑자기 혁명이 일어날 리도 없고,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질 리도 없다는. 다만 그것이 절망이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답하고싶다. 모든 변화는 ‘사이‘에서 꿈틀대는 법이니까. 서로를끈질기게 응시하는 두 자매 사이에서, 그리고 글자를 핑계로이렇게 만난 당신과 나 사이에서.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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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너는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기 시작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자전거가 들판을 달려나갔다. 그러다 나란히속도를 맞췄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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