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끝에 찾은 두 번째 방법은 통화였다. 휴대폰만 손에 쥐고 있으면 누구도 우리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까 휴대폰은 우리가‘평범한 현대인‘이라는 표식이었다. - P41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입시를 준비할 때만 해도 여러 대학에서 수험생에게 화장하지 않은 민낯을 요구했다. 우리는 실기 시험을 치르기에 앞서 얼굴 검사를 받았다. 진행 요원은 물티슈를 들고 와서 대기 중인 학생들의 얼굴을 일일이 문질러 닦았다. - P50

멀쩡한 옷을 입고 입술도 좀 찍어 바르라조언했고, 나는 그들의 편협한 사고에 힘만 보태줄 뿐인걸알면서도 한동안은 그렇게 했다. 그들은 화사해진 내 얼굴에 반색했고 더 쉽게 훈수를 뒀다. 타인의 무례를 상대하는데 필요한 건 화장품이 아니라 그들의 눈을 가만히 응시할수 있는 단단한 내면이라는 걸 어렵게 배웠다. - P52

그러나 지키고 싶은 존재가 있는 사람은 그럴 수 없다.
간절하게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이 늘 약자다. 입을여는 순간 괜한 시비에 말려들 것을 알면서도, 상대방을완전히 이해시키거나 설득하지도 못할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입을 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발적 패배자가 되고마는 것이다. - P62

이번 이사에서 가장 눈여겨본 건 집의 내부가 아니라해당 건물 세대수였다. 세대수가 적을수록 경비 아저씨나관리실 직원의 눈에 띌 확률이 높아진다는 게 우리의 결론이었다. 사실 부모님이 함께 거주한다는 오해를 받는 건문제가 아니었다. 진짜로 조심해야 하는 건 우리 자매가 이동네 열혈 길고양이 돌보미라는 사실이었다. 무엇이든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되는 세상에서, 문제 삼을 거리를 제공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 - P82

이 결말엔 어쩌면 우리 자매의 단단한 비판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갑자기 혁명이 일어날 리도 없고,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질 리도 없다는. 다만 그것이 절망이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답하고싶다. 모든 변화는 ‘사이‘에서 꿈틀대는 법이니까. 서로를끈질기게 응시하는 두 자매 사이에서, 그리고 글자를 핑계로이렇게 만난 당신과 나 사이에서.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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