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아직 읽고 쓰는 습관이 배지 않았을 때에도이따금 나는 대가리가 커다란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 기록해보곤 했다. 전공시간에 칭찬이라도 한번 받으면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웃었다. 그작고 불편한 방에 신을 벗고 들어설 때마다 이상하게 쉬러 가는 느낌이 들곤 했다. 어쩌면 방을 구하던날 이후 영원히 내 머리 위를 떠나지 않던 태양, 그때문인지도 몰랐다. - P27

지금까지 여러 장소에서 살았다. - P9

바람이 일어나는 등압선을 보듯.
활자가 돋아나는 손가락 끝 지문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 P125

처음으로 등단 소식을 들은 곳은 대학교 컴퓨터실이었다. 수화기에 대고 내가 ‘소설인가요, 시인가요?‘라고 묻자 저쪽에서 소설이란 답이 들려왔다.
시는 예선에도 못 올랐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되었을 것을 굳이 얼굴을 붉혀가며 물은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내가 소설가인지 시인인지 알고 싶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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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은 나무 꼭대기부터 환하게 물들였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 P37

이제 혜원은 죽었고 혜원의 아들은 영영 이메일에 접속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혜원의 여동생조차 홍천의 아파트에대해 모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무섭도록정확하게, 그것을 알고 있었다. - P15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서랍이 닫혔다. - P229

"저거 타볼래요?"
충동적으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회전목마와 나를 번갈아 봤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의외로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아이처럼 웃었고 앞장서서티켓을 끊어오기도 했다.
우리는 곧 회전목마에 올랐다. - P247

용서....
귀하의 지난 메일을 읽은 이후 용서라는 단어가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머릿속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돌처럼 굴러다니는 그 단어를 더 깊이 숨기지도, 꺼내어 제거하지도 못한 채 지난 며칠을 보냈습니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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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각본
박찬욱.정서경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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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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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₁)그리고 그들의 집에열린 어느 창문가에나의 시를 읽으며 앉아 있을아끼는 의자 하나가 있기를.
(Lesno)페르난두 페소아의 시집 『시는 내가 홀로 있는방식」(민음사)에 수록된 시 「양 떼를 지키는 사람」

나는 종종 서향 창 앞에서 본다는 게 무엇인지생각해봅니다. - P10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나는 썩 괜찮은 창을 가진것 같습니다. 기억을 볼 수 있는 창과 내게 흔적을남기는 빛이 들어오는 창. 고백하자면, 그것은 내가쓰고 싶은 글이기도 합니다. - P15

"유진아, 유진아."
이층에 불이 켜졌다.
엄마가 뛰어 내려와 문을 열었다.
"유진아."
엄마와 나는 서로를 불렀다. - P23

그러나 이쪽에 불이 꺼져야 비로소 환하게 보이는것들이 있다. 멀어진 것들이 남기고 간 굴곡진 풍경같은 것, 그러니까 시간의 주름. - P27

"엄마, 어떤 작가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무언가를구하기 위해 글을 쓴대." - P36

우리는 그런 것을 우정이라고 불렀다. 어디든 같이가는 것. 학교 화장실, 면도칼 씹어 먹는 언니들이있던 6학년 복도, 기차가 달리는 다리 위, 비가 오면발가락 사이에 파 뿌리가 끼는 시장, 엉덩이들이달처럼 뜨는 골목, 우리가 잘 아는 곳, 우리가 잘모르는 곳, 우리에게서 가장 먼 곳, 어디든.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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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친구 얘기를 했었죠. 대단해요. 그 녀석. 학교에서 소문이 자자한 타고난 연애 박사인데 정작 본인은 아직도 제 싹을 듯만났다니까요. 아무튼, 며칠이 지난 다음 그 친구에게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자기가 먼저 조선작의 새로 나온 소설을 읽어봤다는겁니다. 저는 ‘왜 그걸 네가 읽냐? 네가 맞선 보냐?‘라면서 우스개 섞어 핀잔을 줬습니다. 친구는 다름이 아니라 그 소설 앞부분 이야기 배경이 북악에 있는 ‘P호텔‘이라는 걸 제게 알려주려고 연락한 겁니다. 제가 영자 씨를 만나게 될 실제 맞선 장소는 ‘호텔‘이지만 어쨌든 소설 속 배경도 평창동 북악터널 근처 호텔이라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 아니겠냐고 하면서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 P53

"말 그대로 인연이 곧 연인이 된 거로군요." - P54

J씨는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책방 주인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책을 끝까지읽을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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