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평생 교육자로 사셨어요.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셨죠. 책을 많이 수집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할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성격이 밝은 분이 아니었거든요. 게다가 저를 보면 붙잡아놓고 늘 책 얘기만 하시니까요. 그래서 명절 때 집에 가면 일부러할아버지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했어요. 이제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어쩌면 지금 찾으시는 이 책이 마지막 책이될지도 몰라요. 그래서 이렇게 사장님을 뵈러 온 거예요. 무슨 책이든 다 찾아주신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 P77

천천히 책장을 살피며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모은 책을 눈에 담았다. 과연 노인은 무슨 책을 찾고 싶은 걸까? 어쩌면 그 책은 그가 마지막으로 손에 쥐고 싶은 책일수도있다. 영상 속 노인의 눈빛에서 나는 그걸 느꼈다. 삶의 마지막을 가장 아끼는 책과 함께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내게 전해졌다. 그건 나의 오해이며 과도한 의미부여일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거대한 장서들을 마주하면서 한 번도 실제로 만나보지 못한 한 노인의 인생을 경험하는 듯한 감동을 전해 받았다. - P80

모든 책은 인생과 마찬가지로 아이러니하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책을 쓴 사람의 갖가지 인생 이야기가 거기 오롯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 P83

아무래도 작전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 기억이 흐릿한 책을 찾을 때는 그 책을 읽었을 때의 추억을 말하도록 이끄는 것도 좋은방법이다. 딱히 책 얘기가 아니더라도 그즈음에 있었던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친구들 얘기를 하다 보면 갑자기 잊고 있던 책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일이 있다. 나는 K씨에게 그 책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다행히 그녀는 책 이외의 일들에 대해선제법 구체적인 기억이 있었다. - P86

"책은 제가 찾았지만, 이 책이 나타날 마음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도 어느 도서관 책 무더기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을 겁니다."
"책이 자기 스스로 나타나줘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 P90

동생은 계속해서 공부하고 싶어 했고○씨는 그깟 공부를 해서 무얼 하냐며 언성을 높였다. 두 사람은 워낙 다른 길을 걸어가고있었기에 제대로 말이 통할 리 없었다. O씨는 화를 참지 못해 어느 날 동생이 쓰는 방에 들어가 책장에 있는 책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동생은 그런 형의 행동에 어쩌지도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널브러진 책을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 - P98

"아뇨. 인생의 답은 마치 우주에 있는 외계문명을 찾는 것과 비슷합니다. 엄청나게 많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철학은 답을 찾는 게 아니라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러셀은 말하고 있습니다. 동생분이 힘겹게 찾으려고 했던 것도 답이아니라 거기로 향해 가는 길일 겁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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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들의 죄가 크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피도 눈물도 없는 삭막한 곳으로 묘사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 죄를 죄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에 뒤집어씌웠다. ‘적자생존은 원래 다윈이 고안한 표현도 아니다. 다윈의 전도사를 자처한 허버트 스펜서 Herbert Spencer의 작품인데 앨프리드 윌리스Alfred Wallace의 종용으로 다원은 <종의 기원> 제5판을 출간하며 당신 이론의 토대인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을 대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소개했다. 그러나다윈의 죄는 거기까지다. <종의 기원>은 물론,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과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그는 생존투쟁ruggefor existence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오로지 주변 모두를 제압하고 최적자the fittest가 돼야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양한 예를 들어풍성하게 설명했다. 그의 후예들이 오히려 그를 좁고 단순한 틀 안에 가둔 것이다. 이 책은 그 틀을 속시원히 걷어낸 반가운 책이다. - P6

나는 이 책이 특별히 반갑다. 조금은 외롭던 차에 학문적 동지를 만나 기쁘고, 인류의 기원과 보편적 인간성에 관한 참으로 탁월한 분석을 맞이해 더할 수 없이 반갑다. 아직도 성악설과 성선설 사이에서 흔들리는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조간신문과 저녁뉴스가 들려주는 사건, 사고 소식에는 인간의 잔인함이 넘쳐나지만, 진화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종들 중에서 가장 다정하고 협력적인 종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정연한 논리로 이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책은 참 오랜만이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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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H의 사진은 없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나는 내 아들 버트, 그리고 바다를 찍고 또 찍었으니까. 이상한 점은 그날오후부터 이틀 뒤까지 사진상 기록에 공백이 있다는 점이다. 이틀 후에 찍은 사진 속에서는 H가 병원침대에 누워 카메라를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려 애쓰고 있다. - P10

이런 재양의 한가운데 어딘가에서, 하나의 공간이 열렸다. 집에서 병원, 병원에서 집으로 오가는 동안, 꾸벅꾸벅 졸고 있는H의 침대맡에 앉아 있는 동안, 병동 회진이 있을 때 매점에서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흘러갔다. 나의 날들은 긴박한 동시에 느슨했다. 나는 계속해서 어딘가에서 깨어 있으며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했다. 그런 한편 불필요한 침입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주변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마음속은 이 새로운 경험들을 분류하고 그 맥락을 찾아내느라 분주했다. - P13

매일의 세계의 톱니바퀴 사이에는 틈이 있고, 때로 그 톱니바퀴가 열리면 우리는 어딘가 다른 세계로 떨어진다. 그 어딘가다른 세계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금 여기와는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어딘가 다른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현실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언뜻 보일까 말까 한 유령들이 산다. 어딘가 다른 세계는 지연된 시간 위에 존재하기에 현실 세계와 보조를 맞출 수 없다. 아마도 나는 이미 어딘가 다른 세계의 언저리에 위태롭게 서 있다가 마침내 마룻장 사이로 떨어지는먼지처럼 가뿐하고 조용하게 그곳으로 떨어진 것이리라. 그곳이 내심 집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어 나는 놀랐다. - P14

누구나 한번쯤 겨울을 겪는다. 어떤 이들은 겨울을 겪고 또 겪기를 반복한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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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군데 반쯤 녹은 눈 뒤덮인 대지 위둥지에서 고개를 갸웃대던 떼까마귀는 까악까악 울고느릅나무 꼭대기에서, 풀꽃처럼 은은하게그 아래 우리는 볼 수 없었던, 겨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해방」 - 에드워드 토머스

‘윈터링‘이란 추운 계절을 살아내는 것이다. 겨울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거부당하거나, 대열에서 벗어나거나, 발전하는 데 실패하거나, 아웃사이더가 된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인생의 휴한기이다. - P8

어떤 겨울은 햇살 속에 온다. 9월 초, 마흔 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둔 어느 무더운 날 내게도 이런 겨울이 찾아왔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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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분명히 여러 번 들어봤을 이 무례한 질문에 C씨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유를 설명했다.
"이유는 단순해요. 사진은 찍는 것, 그리고 그림은 그리는 거잖아요?" C씨는 손가락으로 셔터를 누르는 동작과 붓질하는 동작을차례로 보여줬다. 내가 "물론, 그렇죠."라고 하자 그녀는 말을 이었다. - P58

"제목만 봤을 때는 뭔가 서정적인 내용이지 않을까 짐작했거든요. 그런데 첫 페이지부터 살인 이야기였어요. 남아프리카의 작은농장이 배경인데 그곳을 운영하던 여주인이 흑인 노예에게 살해당한 사건이었죠. 그녀의 남편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나간 상태였고, 사람을 죽인 흑인 노예는 도망치지도 않고 사건 장소 근처에있다가 경찰이 오자 곧바로 자수했어요. 인적 드문 바닷가 마을에서 여자 혼자 지내게 된 첫날에 읽을만한 내용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조금읽다가 말았어요." - P60

"놀랍게도 소설과 비슷한 부분이 많았어요. 심지어 칼부림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남편이 정신을 놓아버린 것도 똑같아요.
사건 직후 범인이 스스로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한 부분도 역시 책 내용과 같죠. 저는 이게 어떤 운명적인 인연이 아닐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어요. 그리고 얼른 다음 날이 오기를 기다렸어요. 점심때 즈음 그 집에 가보니 할머니가 마루에 나와 앉아 계셨어요." - P62

"강화도에서 그렇게 석 달을 지내고 난 다음에도 저는 자주 할머니를 찾아뵙곤 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참즐거웠어요. 할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가족이 아무도 오지 않아서 장례는 간소하게나마 제가 대신 모셨어요. 그리고 할머니께서 사시던 집을 수리해서 이제부터는 거기 머물면서 제 작업을 이어가려고 해요.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방향을 잡는 게 쉽지 않았는데, 할머니의 도움이 컸어요. 저는 그림에 이야기를 담으려고 해요. 할머니가 들려주신 강화도 이야기, 바다 이야기,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사랑과 미움에 관한 이야기도 그림에 담을 생각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 그 책을 읽어보려고요. 시간은 오래걸려도 괜찮아요. 찾으시면 강화도로 한번 놀러 오세요. 저희 동네는 바닷바람이 센 편이라 해가 질 무렵이면 정말로 풀잎이 흔들리면서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답니다." - P65

입수한 책의 서지를 보니 출판연도가 단기 4292년이다. 서력으로는 1959년. 덕수출판사에서 펴낸 초판이다. 오래된 책이지만비싸게 거래되는 것은 아니기에 A씨에게는 우편으로 보내드렸다. 하지만 이 책을 먼저 읽는 기쁨은 책을 찾은 사람의 특혜라고 할수 있다. 낡아서 바스러질 것 같은 본문 종이를 조심스럽게 넘기며 주느비에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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