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분명히 여러 번 들어봤을 이 무례한 질문에 C씨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유를 설명했다.
"이유는 단순해요. 사진은 찍는 것, 그리고 그림은 그리는 거잖아요?" C씨는 손가락으로 셔터를 누르는 동작과 붓질하는 동작을차례로 보여줬다. 내가 "물론, 그렇죠."라고 하자 그녀는 말을 이었다. - P58

"제목만 봤을 때는 뭔가 서정적인 내용이지 않을까 짐작했거든요. 그런데 첫 페이지부터 살인 이야기였어요. 남아프리카의 작은농장이 배경인데 그곳을 운영하던 여주인이 흑인 노예에게 살해당한 사건이었죠. 그녀의 남편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나간 상태였고, 사람을 죽인 흑인 노예는 도망치지도 않고 사건 장소 근처에있다가 경찰이 오자 곧바로 자수했어요. 인적 드문 바닷가 마을에서 여자 혼자 지내게 된 첫날에 읽을만한 내용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조금읽다가 말았어요." - P60

"놀랍게도 소설과 비슷한 부분이 많았어요. 심지어 칼부림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남편이 정신을 놓아버린 것도 똑같아요.
사건 직후 범인이 스스로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한 부분도 역시 책 내용과 같죠. 저는 이게 어떤 운명적인 인연이 아닐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어요. 그리고 얼른 다음 날이 오기를 기다렸어요. 점심때 즈음 그 집에 가보니 할머니가 마루에 나와 앉아 계셨어요." - P62

"강화도에서 그렇게 석 달을 지내고 난 다음에도 저는 자주 할머니를 찾아뵙곤 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참즐거웠어요. 할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가족이 아무도 오지 않아서 장례는 간소하게나마 제가 대신 모셨어요. 그리고 할머니께서 사시던 집을 수리해서 이제부터는 거기 머물면서 제 작업을 이어가려고 해요.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방향을 잡는 게 쉽지 않았는데, 할머니의 도움이 컸어요. 저는 그림에 이야기를 담으려고 해요. 할머니가 들려주신 강화도 이야기, 바다 이야기,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사랑과 미움에 관한 이야기도 그림에 담을 생각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 그 책을 읽어보려고요. 시간은 오래걸려도 괜찮아요. 찾으시면 강화도로 한번 놀러 오세요. 저희 동네는 바닷바람이 센 편이라 해가 질 무렵이면 정말로 풀잎이 흔들리면서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답니다." - P65

입수한 책의 서지를 보니 출판연도가 단기 4292년이다. 서력으로는 1959년. 덕수출판사에서 펴낸 초판이다. 오래된 책이지만비싸게 거래되는 것은 아니기에 A씨에게는 우편으로 보내드렸다. 하지만 이 책을 먼저 읽는 기쁨은 책을 찾은 사람의 특혜라고 할수 있다. 낡아서 바스러질 것 같은 본문 종이를 조심스럽게 넘기며 주느비에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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