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태평양 어디쯤에서 거대한 섬을 이루면서 둥둥 떠다니고 있을까. 표류한 뱃사람들이 그 섬을 발견하고 거기서 조금이라도 쉴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 같다. 어쩌면 내가 그것을 완벽하게 잊을 때쯤 그것이 나를 찾아올지도 모른다. 집 앞에서 서성거리거나 문을 살짝 두드리는데 누가 봐도 당장 신고할 것 같은 모양새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운 좋게 내가 그들을 알아본다면, 태평양을 항해하느라 낡고 해진 몸을 차곡차곡 쌓아둔 《The Disaster Tourist) 100권이 거기 웅크리고 있음을 알아본다면, 그러면 나는 서재에 자리를 펴고 돌아온 책을 맞이할 것이다. - P237

요즘 같은 검색 시대에는 쉽게 알아낸 정보들은 금세 잊게 된다. 호기심을 바로 해결할 수 있지만 깨달음이 길게 지속되진않는다. 대부분은 무언가를 궁금해했다는 느낌까지 함께 증발해서 빈자리조차 남지 않는다.
이 목소리 어디서 들었더라, 이 향기가 뭐지, 그걸 바로 해소할 수 있는 목소리 검색이나 향기 검색이 있다면 어떨까 하다가도 곧 정반대의 마음을 품게 된다. 아무리 해도 검색되지 않는 영역과 누구도 알 수 없는 세계가 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호기심을 그냥 놓아두면 어떤 것은 시간 속에서 망각하고 어떤 것은 기어코 알게 되고 어떤 것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셋 중에 기억의 유효기간이 가장 긴 건 수수께끼다. - P240

그러나 또 어느 출근길에는 이런 풍경을 보기도 한다. 눈이 오던 어느 겨울, 누군가가 눈 위에 적어둔 ‘화이팅‘이라는 세 글자 근처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발자국 하나가 남아 있다. ‘화이팅‘을 잠시 보고 지나가려던 나는 결국 휴대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는다. 이런 풍경이 우리를 조금 더 살게 하니까 놓치면 안 된다. 특히 눈이 오는 날엔 길바닥을 잘 보고 다녀야 한다.
길 위에 이렇게 우리를 흔들어두는 말이 있을지도 모르니.
치킨이나 커피 쿠폰 몇 장을 모으면 보너스 하나가 따라오는 것처럼 다정한 장면을 열두 장쯤 모으면 기대하지 않았던 보너스가 따라온다고 상상해본다. 반짝반짝 쿠폰 열두 장을 들고서 담당 창구로 가면 단골임을 알아보면서 보너스를 주는 것이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보너스는 수명 연장이다. 쿠폰 열두 장에 내 삶이 한 시간 연장되어도 좋고, 반나절 연장되어도좋고, 통 크게 하루쯤 연장되어도 좋다. - P244

"오르막이 보이면 미리 가속한 힘으로 올라가는 거야. 기어 변속을 못 하는 자전거면 더, 기어 변속이 되면 미리 바꿔놓고.
어떻게 보면 인생이랑 닮은 것 같지 않아? 예열하고 준비하는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거잖아."
호이안에서 L이 했던 말을 종종 떠올린다. 내가 오르막길을 만날 때마다 예열하고 준비한 힘으로 통과하는 건 아니지만,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기도 하지만, 우리가 맘만 먹으면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은 채로 그 오르막을 통과할 수도 있다는걸 보고 듣는 게 어쩐지 든든하게 다가와서 그 말을 좋아한다. - P248

바퀴의 궤적으로만 비교해보면 자전거는 자동차처럼 감쪽같은 후진을 시도하는 게 영 어색한 이동수단인데, 어찌 보면 바로 그 점이 우리 삶과 닮은 것 같다. 뒷걸음질로 계속 이동하려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얀 마텔의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는 1년째 뒤로 걷는 사람이 나오지만 그에게는 뒤로 걷기를 동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가던 방향과 정반대로 이동해야 할 때, 사람들 대부분은 뒤였던 그곳을 앞에 두고 걷는다. 그게 우리의 방식이다. 자전거와 우리는 감쪽같은 후진을 포기하고, 바퀴의 궤적을 새로 그리면서 돌아선다. 조금 전까지 등 뒤에 있던 세계를 이제 눈앞에 두고 달리는 것이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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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란 표현과 지칭인데 실은 애매하고 모호하며 매우 안타까운 것이기도 하지요. - P31

자유스러운 속성도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물질은지칭할 수 있으며 현상도 눈에 보일 적에는 지칭할 수 있으나 정신은표현 이외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 P35

정신적 영역이야말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되풀이되는 얘기지만 생각이야말로 나의 실체니까요. - P39

소설에 무의미하게 등장하는 존재는 없습니다언제였는지 《토지》가 드라마로 나갈 때 소도구를 담당하는 분이 방송국에서 발행되는 잡지에 글을 쓴 것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인상적인것은 화면에 나오는 조약돌 나무 한 그루까지 모두 연기자라고 했던 말이었습니다. 소도구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겠지만 작가의 경우에도그렇습니다. 풀 한 포기, 산그림자, 새들의 울음. 그것들은 간주곡 같기도 하지만 결코 장식은 아닙니다. - P45

잘 복고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습니다. 나는 복고주의자도 아니지만 시간은 돌이켜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물질을 어찌하여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다스리지 못하였나 하는 점입니다. 합리적인 물질을 이성 잃은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괴물로 만들어왔다는 그 점이 안타깝고 가슴 아픕니다. - P59

여러분들 중에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론에 연연하면 안됩니다. 사로잡히면 작품 못 써요. 사는 것을 생각하세요. 끊임없이 사는 모습을, 그리고 자연과 모든 생명의 신비를 감지해야 합니다. 넓고깊게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이 그 속에서 이론이든 이치든 발견하십시오. 남이 간 길을 뒤쫓지 말구요. 대개 우등생이 작가로서는 시원치 않다는 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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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말과 살아 있는 문장은 그 방법에서 별개가 아닌가 싶다.
문장은 응축해야 하는 것이지만 말은 풀어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 얘기는 체계적이기보다 항상 직감적인 것이어서 두서가 없고 산만할 것입니다. 주제에서 떠나 끝없이 가지를 쳐나가는가 하면 상하로오르내리다가 주제로 돌아오는데 또다시 외출을 하고, 수학의 공식과달라서 문학은 방황이며 추구이며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학점에 구애되지 말고 자신이 취할 것만취하세요. 문학은 사회문제·철학·역사·경제·정치, 모든 것을 포용합니다. 문학이란 삶에 관한 것입니다. 그 점은 다른 학문도 같습니다.
철학이나 경제 · 역사 모두는 삶을 기초로 논리를 세우고 제도를 만들며 진실을, 혹은 사실을 기록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모든 학문은 삶이현장이며, 삶은 모든 학문의 기초입니다. 그러나 삶의 총괄적인 것을다루어야 하는 문학은 어떠한 부분, 어떠한 분야도 수용해야 하지만 그것은 실체가 아니며 사실도 아니라는 점, 그러면서도 진실을 추구하지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해서 소설을 창작이라 한다는 것을 먼저 말해두고자 합니다. - P12

그렇습니다. 존재란 무한속의 유한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유한에 한恨이 있는 것입니다. - P22

그럴 때 나는 대답할 바를 모릅니다. 고독하지 않고 글을 쓴다면 참이상한 일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좀 자주 고독해보세요. 고독하지 않고서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고독은 즉 사고니까요. 사고는 창조의 틀이며 본입니다. 작가는 은둔하는 것이 아니며 작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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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 PD4K 30 S9 KPEA99내가 떠올리는 낭만은 두 사람이 버스에 나란히 앉아 줄 달린 이어폰을 한쪽씩 끼고 음악을 듣는 장면이다. 혼자지만 연결된 느낌, 좋음의 나눔, 적절한 소란과 고요의 공존, 정처 없는 떠남을 동경했다.
늘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싶었는데 그것이 혼자는 아니었다. 같이 있을 때 내 존재는 더 활성화됐다. 운 좋게도 직업을 통해 ‘둘의
‘낭만‘이 지속 가능한 길이 열렸다. 사람을 만나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이 된 것이다. - P5

"내가 노들에서 십몇 년간 한 모든 것이차별을 저항으로 만드는 일이었구나.
차별과 저항이 얼마나 멀고 이어지기 어려운지 알았죠.
그게 얼마나 어렵냐면 내 청춘이 거기 다 들어간 거예요,
우리의 청춘이."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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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 - 언어생활자들이 사랑한 말들의 세계 맞불
노지양.홍한별 지음 / 동녘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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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잘 읽히는 동시에 직업인의 세계와 마음이 깊고 진하게 전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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