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기: 어떤 의미에서는 뒤로 가는 실험을 하는 것이 앞으로 가는 실험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을 수도 있다. 뒤로가나 앞으로 가나 우리들 모두는 둥근 공처럼 생긴 별에 산다.
만난다, 어디에선가," - P100

모국어의 층이 나도 모르게 점점 엷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 때도 있었고 어쩌면 그 감각은 의도적으로 잃어버리려 애써야 하는 건지도 모르지. 새로운 것이 나오기 위해서는 필연적일 수도 있을 만큼." - P121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포르투갈 시인이 있잖아. 그 사람이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나는 포르투갈어로 시를 쓰지 않는다. 나는 나로 시를 쓴다.‘ 이 말이 내 경우에도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우리가 한국어라는 뜨거운 언어공동체 속에 있긴 하지만, 결국은 ‘나‘를 쓰는 거잖아. 나‘라는 존재가 바로 언어지." - P101

"응. 눈 내리는 것을 볼 때마다 아득해지잖아. 나는 늘 눈송이들이 어떤 마음을 나르고 있다고 생각했어. 차가운 것이 애가 타니 어쩔 수 없어지는 거지. 그때의 눈은 흡사 그리움의 결정처럼 보이지. 극지방이 아닌 이상, 눈은 보통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스르르 녹아버리잖아. 그리움도다르지 않지. 서서히 옅어지지. 하지만 남아 있지. 그리고반드시 다시 찾아오지." - P105

"시인으로서의 삶이 지난하다는 걸 모르고 열정만 가득하던 시절, 말의 어려움과 지난함과 지극한 가벼움과 가벼움뒤에 서 있는 사랑과 삶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만 젊어서 불렀던 노래들이 그 시집 안에는 담겨 있습니다." - P109

허수경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시란,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삶의 내용이지. 시인은 탄생과 탄생을 거듭하다가 어느 날 폭발해버리는 존재고."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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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집은 이미 비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히있었던 것 같은데. - P86

"그거 무슨 펜입니까?"
"볼펜이에요. 싸구려예요."
"특이하네요. 좀 보여주십시오." - P97

"에쓰코 씨는 정말 강철 같은 의지의 소유자야."
치에코가 말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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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면 다른 엄마들보다 더 비겁한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할머니이지 엄마가 아니다.

나에게 관심 가지는 사람은나밖에 없음에 안도하며

아직 젊은 사람들은 나이들어감으로 인한 이러한 호칭문제에 대해서 별생각이 없겠지만, 우리처럼 늙은 사람들은 지나오는 나이 대마다 호칭 하나에도 여러 가지 감정을겪으며 지내왔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에는 당연히 누구도 해외여행을 못 가서 박탈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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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2년 뒤인 1955년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는 4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교실 일부 벽면이 전쟁의 상흔으로 허물어져 있었다. - P206

사는 동안 이렇게 여러 이유와 인연으로 만든 모임들이제법 되다보니, 한창 중년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에는 망년회를 하는 연말쯤에 부부 동반으로 자주 나가니까 딸내미가 "연예인 부부, 오늘 저녁은 어디로 가시나요?" 이러면서 놀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거의 다 정리가 되고 다들모임 자체를 안 한다. - P240

가만히 살펴보면 남자들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이야기들을 질리지도 않고 모일 때마다 해서, 여자들도 이들이대학교 다닐 때 무슨 짓을 했는지 무슨 사건을 일으켰는지다 알 정도이다. - P238

돌아보면 그동안 맺어왔던 모든 인간관계가 지속적으로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게 확실하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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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을 배우는 동안 단 한 번도 생각을 멈추는성공한 적 없었으나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가노인들의 운동이라고 우습게 여겼던 ‘기‘라는 단어가프랑스어로는 ‘l‘énergie 에너지‘이고, 그 에너지란 나이가아닌 삶을 향한 육체적, 정신적 태도에서 나온다는 것.
태도가 나이를, 외모를, 스펙을 이긴다는 것. - P20

막이 오르기 직전에 심호흡을 하고 기도하는 곳. 한 걸음 나아가면 탄생하고, 한 걸음 물러나면 무릎가 되는자궁이자 무덤. 요즘 나는 컴퓨터 화면 앞에서 그곳을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이 자리가 그곳인지도 모르겠다. - P31

글을 쓰는 삶을 산 이후로 나의 오랜 두려움은 목소리를 잃고 길을 잃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런 두려움 때문에 번역을 시작했던 것 같다. 다른 작가들의 목소리를조금 더 가까이 들어보고 싶어서, 할 수 있다면 그것을내 안으로 옮겨 오고 싶어서. - P33

글쓰기가 문장을 무덤 속에 파묻으며 언젠가 그것이 집이 되기를 희망하는 일이라면, 번역은 누군가 단단하게 세운 집을 부서뜨리고 그것의 잔해를 옮겨 와 재건하는 일이다. 부서뜨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 P3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이민자들이 각기 다른 억양으로래하듯 프랑스어를 말할 때, 외국인들끼리 완벽하지 않은 프랑스어로 서로의 말을 알아들으려 애쓸 때, 가장간소한 말로 더듬더듬 사랑을 고백할 때,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었다. - P38

예를 들자면 그에게 봄바람은 ‘살랑살랑‘ 부는 것이아니라 ‘사랑사랑‘ 분다. 물론 연속되는 ‘ㄹ‘ 발음이 어려운 탓도 있지만, 봄바람이 주는 설렘과 사랑이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 역시 사랑사랑 부는 바람이싫지 않아서 얄궂게도 고쳐주지 않는다. - P43

여름밤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다. 더위에지친 하루도, 어쩐지 소원해진 우리 관계도, 거기 찰싹붙어 있는 그 커플도, 싸구려 술잔도 모두 쨍그랑. 내가프랑스에서 살며 18년 동안 깨부순 푀르식틱트 유리잔을 쌓아보면 작은 무덤 하나는 나올 것이다. - P55

잔은 액체에 형체를 만들어주고 형체는 감각을 부여한다. 그리고 감각은 구체적인 기억을 남긴다. 나는 잔을 쥐고 있던 손과 살포시 포갠 손, 잔에 닿았던 입술과잔을 채우던 숨과 내게 와 닿았던 입술을 기억한다. 그짧고 짙은 숨의 온도를. - P59

"역시, 내 꿈은 정확해!"
엄마는 지나치게 긍정적인 사람이고, 그래서 꿈조차도
‘좋은 쪽‘으로 가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나는 그런 엄마가 귀엽고, 귀찮고, 또 그런 엄마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 P64

"Girls, Did you shop at H&M얘들아, H&M에서 쇼핑했니?"
언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때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잊히지않는 청춘의 한 장면이 있지 않은가. 나는 그때 막연히내가 가장 젊은 순간을 살고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 P79

"그럼 시간을 믿어봐. 시간이 자네 편인 날이 와. 시간이 자네의 힘이 되는 날이 온다고."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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