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지난번의 푸른 신호가 다하도록 중앙선까지밖에 걸어올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삼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그는날씨에 걸맞지 않은 겨울 털점퍼에 투박하고 빛바랜 군청색기지바지 차림이었다. 목발을 짚은 왼쪽 바짓가랑이는 무릎위까지 비어 있어서 황사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대로 펄럭거리고 있었다. - P101
아주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그날 이사하던 집의 젊은 가장은 지난해 여름밤 중형 승용차를 과속으로 몰고 가다가 나란히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한 쌍의 젊은 부부를 치었다고했다. - P103
사내가 목발을 짚은 모습으로 그들 식구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내는 놀이터로 찾아와 그 집의 두 아이들이노는 모습을 노려보았으며, 그의 음산한 응시는 아이들이 공포 때문에 놀이를 그만둘 때까지 계속되었다. - P103
"없소." "그래두 전에 쓰시던......" "모두 불태웠소." - P105
승용차가 출발하자 트럭들도 뒤따라 요란한 엔진음을 내며떠났다. 이제 널따란 아파트 광장에는 쓰레기 봉지들과 종이조각들만 차가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사내는 뿌리만 박힌 채 몸뚱이는 잘려져 나간 고목 등걸처럼 광장 구석에 붙박여 서서 모두가 떠나고 남은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었다. - P106
"간단한 거요......! 나한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집을 이제그쪽에게 줄 테니 받아달라는 거요!" - P110
활짝 열어놓은 유리문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마치무덤 같았다. 밤 불빛들은 그 무덤에 함께 순장된 값싼 보석들처럼 보였다. 햇빛 아래 그토록 무덥고 요란스러웠던 도시, 숱한 싸움과 음모와 만남들이 끓어넘치던 서울은 석관(石棺)과도 같은 서늘한 어둠 속에 길고 나른한 육체를 누이고 있었다. - P111
"저 방에서, 저 불빛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오?" 푸른 연기를 내뿜으며 명환은 꿈꾸듯이 아파트의 불빛들을바라보았다. 담배 연기는 어둠 속에 풀어져 가느다란 물줄기처럼 명환의 상반신을 휩싸고 있었다. - P114
멍청스러운 미련이란 결국 내가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 아무것도 끝나지도 시작되지도 않았으며,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한다기보다는 지금 이대로의 상태로라도언제까지고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불분명한 용기였다. - P116
"이만큼만, 꼭 이만큼만 삼키다가 뱉어놓았소. 아마......"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만큼만 삼켜놔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소." - P121
시간은 더디 흘렀다. 동녘 하늘에서부터 새벽이 희부윰하게 동터오기만을 기다리며 나는 명환을 생각하고 있었다. 저넓은 방에서, 가구 하나 들여놓지 않은 채, 불도 한번 켜지 않은 채 뒹굴며 살아왔던 명환을 생각했다. 명환의 방에서부터헤엄쳐 온 어둠은 술렁거리며 내 베란다 문을 두들겨댔다. 어둠은 항암제 부작용으로 뽑혀 나간 인숙언니의 치렁치렁한머리채 같았으며, 뱃속에 명환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는 얼굴모를 여인의 하혈(下血) 같았다. - P125
"오늘 아침에 떠나요." "다들 가는군." 잠시 정적이 흘렀다. - P130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서서 당신의 불 꺼진창을 노려보았던 것인가. 어째서 그리움이 가득한 눈으로 불빛들을 바라보았던 것인가. 어떻게 살아 있는 동안 빈손이 될수 있다는 말인가. 이 세상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는 한 어떻게 완전한 빈 몸뚱이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 P132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없어." 명환의 음성은 불분명하게 잦아들어갔다. "…………너도 마찬가지야. 나를 도울 수 없어." - P135
눈물이 뜨겁다는 것을 처음 안 사람처럼나는 진저리를 쳤다. - P139
"제천에서부터 태백선(線)을 타고 산맥을 넘는다. 마침내 기관차가 어둠을 뚫고 새벽에 이르면 동해(東海역에서부터 바다를 보며 달린다......" - P147
적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날카로운 발톱을 타고난 탓에아무것에나 쉽게 상처를 입히는 맹수처럼, 동걸의 눈에서는사람을 두렵게도 하고 매료당하게도 하는 야생의 힘이 발산되고 있었다. - P149
‘ 나는 외로웠으며 그 얼굴이 어쩐지 그리워졌다. 동걸의 행동은 언제나 거칠지만 이상하게 사람을 방심하게 하는 따스함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 P155
뾰족이 즐겁지 않은 군대 이야기와 지난 시절 이야기, 녀석의 직장 이야기를 근근이 이어가던 우리는 종종 깨진 병 조각같은 침묵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곤 했다. 열 시도 되기 전에손목시계를 여러 번 들여다보던 동걸은 그만 일어서자고 말했다. - P157
"동걸이가 친구를 데려온 것은 처음이야." 동걸의 어머니는 내 사과에 답하는 대신 석유곤로에 데운물을 대야에 담아주었다. 내가 얼굴에 비누칠을 하고 물을 비우자 그녀는 빈 대야에 다시 더운물을 부었다. 그리고 손으로온도를 가늠해가며 찬물을 틀어주었다. 어머니. 아직 취중인 나는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P167
"하지만 어머니도 동걸 오빠도 희망을 버리지 않아요. 어쨌든 동주 오빠는 살아 있으니까요. 유일하게 포기해야 한다고말하는 사람은 난데" 선주는 손동작을 멈추고 자신이 닦아낸창밖을 우울하게 내다보았다. "실은 나 역시 희망을 버리지못하고 있어요." - P175
떠나리라는 것 때문에 동걸은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강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탈출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켜줄 야간열차가 있으므로 그는어떤 완성된 인생도 선망할 필요가 없었다. 살아가며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오욕들에게도 그는 무신경할 수 있었다. - P175
동걸의 눈가에는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 선주의 이야기 때문에 생긴 선입견만은 아니었다. 그는 과연 지쳐 있었고 몹시생활에 쫓기고 있었다. 실상은 늘 지어왔을 터이나 다만 실체를 몰랐기 때문에 종종 놓치곤 하였던 동걸의 표정을 나는 이제야 감지할 수 있었다. - P184
"영현아, 오늘 나와 함께 벽제에 가자." 녀석의 목소리는 집요했다. "안돼 이 자식아." - P191
역 광장은 떠나려는 사람들과 돌아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는 시계탑 앞에 서서 기다렸다. 내가 놓쳐온 모든 것을 기다리듯이 나는 기다렸다. 내가 사랑하지 않았고 다만 경멸하며 흘려버린 젊음을 기다리듯이 묵묵히 기다렸다. 기다림만이 나를 속죄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기다리고 기다렸다. - P195
나는 객실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엎어지며 다친 무릎과 더러운 손바닥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나는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비비며 빗발 속에서 춤추는 인가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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