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그것을 미친 여름이라고 불렀다. - P67
이지러진 달의 둥근 면은 핏기 없이 누리끼리했고, 베어져 나간 단면에는 검푸른 이빨 자국이 박혀 있었다. 그 깊숙한혈흔(血)을 타고 번져 나온 어둠의 타액이 주변의 천체들을집어삼키고 있었다. 밤하늘은 온몸을 먹빛 피멍으로 물들인채 낮은 소리로 신음하며 뒤척이고 있었다. - P69
명환의 경직된 어깨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마치 오랜 시간 혼자서 굳혀온 음험한 확신이 어깨 근육으로만 집중되어 뭉쳐진 것 같은 뒷모습이었다. - P74
사는 곳과 옷차림이 남루했지만 나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비록 눈밭에서 잠들었을지라도 잠결에 흐트러진 의식 속에서는뜨뜻한 이부자리 속에 누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희망이어서, 그 솜털 같은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나는 뒤끝이 쓴 행복감에 깔깔한 입맛을 다시곤 했다. - P76
그러던 우리가 친자매와 같은 친밀감을 가지게 된 것은 연탄가스에 함께 중독되고 난 뒤부터였다. 그날 밤 먼저 잠에서깨어난 사람은 나였다. 아랫목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인숙언니의 얼굴을 문턱까지 끌어 올려놓고 부엌으로 나오던 나는축축한 시멘트 바닥에 엎어져 목줄기를 움켜쥐며 토악질을했다. 주인집 현관 돌계단을 어떻게 기어올랐는지, 문을 어떻게 두들기고 도움을 청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 P79
"너한테는 아직도 희망이 많지?" 그러던 어느 날 밤 인숙언니는 누워 있는 나에게 물었다. - P81
"나는 나대루, 갑자기 전세금 마련하느라고 빚까지 얻었다우. 계약 기간이 아직 반년이나 남았는데 말야. 둘이서 급한사정이 있나 부다 했지, 그때 이상하다는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아가씨가 모르는 일일 거라는 생각두 못 했어......" - P85
내 모든 것을 끝장나게 만들어놓았으니, 인숙언니의 인생도끝장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숙언니와 함께 보낸 몇 달이모조리 배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하면 더욱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한 인간에게 살의를 느꼈다. - P87
승강기가 내려오지 않으면 차분히 가방을 대각선으로 둘러메고 계단을 밟아가기 시작했다. 싸늘한 난간을 오른손으로짚으며, 구부정하게 허리를 수그린 채 오르다가 층계참의 창문 앞에 멈추어 어둡고 적막한 아파트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십삼층까지 다다르고 나면 마침내 초인종을 눌러야할 철문이 거기 있었다. - P89
내가 강명환이라는 사내를 만난 것은, 그렇게 삼월이 가고, 황사 바람에 뒤섞여 우박 같은 진눈깨비가 어지럽게 나부끼곤 하던 사월의 일이었다. - P97
You are like a flower that grows in the shade; the gentle breezecomes and bears your seed into the sunlight, where you will liveagain in beauty.*너는 음지에서 자라는 꽃과 같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네씨앗을 햇빛 속으로 나를 것이니, 너는 그 햇빛 속에서 다시 아름답게 살게 될 것이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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