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토록 무르고 물리지 않는, 무를 수 없는 마음에 대하여. 꼼꼼하고 단단한 소설들. 박혜진 평론가의 글도 참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은 아마도 한달음에 쓰인 뒤 영원히 잠가져 오로지 나 외엔열람이 불가능한 사적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혹은, 그 반대도 가능하다. 이것은 내 정체화에 대한 공적 기록이 될지도 모르겠다. - P185

놀랄 일이 아니었다. 나보다 더 아픈 사람들, 아프다는 현상에 나보다 더 예민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나는 종종 건강한 사람으로 여겨졌고 덜 예민한 무던한 사람으로 통했다. 고통은 절대적인 동시에 상대적이었다. - P187

그렇게 말하는 은주는 약해 보였다. - P189

저는 아무도 상처주지 않아도 알아서 상처를 받는 능력이 있어요. 그리고 그 상처를 무시하거나 덮어놓지 않고 내내 뚫어져라바라보는 습관도 있고요. 아주 최악이죠? - P192

애인의 긴 답장. 그건 마치 잘못 보내진 편지 같다고 은주는 생각했다. 이걸 봐야 할 사람이 있다면 자신도 애인의 친구도 아니고, 애인의 전 여자친구인 혜인인 것 같다고. 이 절절한 사랑 고백. 문득 자신은 생에서 한 번도 이런 사랑과 인정과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인에게서조차. - P195

은주씨, 저도 그런 적 있어요. 유구하고 보편적인 문제예요.
그 말에 은주는 너그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사람.
나는 은주에 대해 단정적으로 생각했다.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내가 좋아할 만한 사람일 거라고, 은주는 대답 대신 이런 말을 건넸다. - P203

죄다 무덤에 넣을 보물들인 것 같아서요. - P206

그리고 은주는 여행을 선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에게만 선언했다. 이미 함께 살게 된 집에서 각자의 공간은 없었다. 그일 때문에 내내 함께 눕던 침대에서 자기를 거부한다면 관계는 가시적으로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영지에게는 정책포럼 때문에 가게 된 독일 출장 기간을 두 달이라고 속였다. 영지와 함께하는 공간에서 자신이 바꿀 수 있는 자리는 그런 것뿐이었다고. - P210

호크룩스? 그게 뭐예요? 내가 모르는・・・・・・ 신조어인가.
시무룩하게 뱉은 내 말에 은주는 멋쩍게 웃었다.
아, 그게 그러니까 <해리 포터>에 나오는 죽음의 마법이에요.
영혼을 쪼개는 거예요. 영혼을 몇 개로 찢어서 그걸 각기 다른 데에 붙이면 원래 몸이 죽어도 영원히 산다고요. - P212

나는 대답 대신 이름을 부르고는 차가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럴까봐서요,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까끌까끌한 입술의 느낌이그대로 와 닿았다. 이것은 살아 있는 몸. 잔인하고 정확한 말을 하던 은주의 목소리가 통과한 출구, 은주에게 영원히 타인일 나의입술이 닿는 입구. 서로 다른 것이 들고 난 이 자리는 무슨 의미를지니는지 생각해보려다가 실패하며, 체온을 덥히지도 체액을 나누지도 않는 이 행위는 무엇을 주고받고 싶은 건가 생각해보려다가 또다시 실패하며, 이제는 정말로 봄인데도 겨울의 한복판에 얼어붙은 것처럼 나를 피하지도 밀어내지도 않는 은주를, 그 마음을생각하며 한동안 입을 맞췄다. - P214

야, 나 레즈비언이야.화가 나서였다. 그즈음 나는 누구든 건드리면 물어뜯겠다는 마음으로 어깨를 굽히고 혼자 걸어다니는 애였다. 너 따위가 뭘 아냐, 뭘 안다고 만지냐 하는 마음으로 물어뜯은 그애. 웃을 때 덧니가 드러나던 그애가 뭐라고 했더라.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빼고는 미안하다고 했던가. - P225

변명 같지만 현정이 멀어 보였던 이유를 하나 더 덧붙여보자면,
그애가 누가 봐도, 당연히, 너무나 이성애자였기 때문이다. 이성애자의 친구로 남는 일은 너무 쉬웠다. 마음껏 품을 수 있는 가장쉬운 마음. 짝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그건 내가 살면서 내내 해온 일이었다. - P231

언니.
응? (얘가 지금 날 언니라고 부른 거야?)저 언니 진짜 좋아해요.
고맙네.
몰랐죠.
응. 몰랐어. - P241

현정은 거의 속삭이고 있었다. 즉석식품이지만 꽤 생생한 옥수수 알갱이를 이로 뭉개며 나는 대답했다. 나는 현정이 준 거라면편의점 콘 수프도 금덩이처럼 받는구나, 도대체가. 그런 생각을하면서도 묵묵히 수프를 떠먹었다. - P245

우리는 우리가숨고 싶을 때 숨을 수 있고 나타나기를 원할 때 나타날 수 있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든 사랑을 할 수 있다. 참 쉽고, 그 쉬운 것이이토록 어렵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 P248

소수는 외롭지만 그렇기 때문에 외롭지 않을걸요. 반대로 그 외롭지 않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외로워지기도 하고요.
정말로 다 알아요, 하는 표정이었다. - P257

지은은 내 어미새 같았다. 어미새보다 나았다. 내가 머저리처럼굴어도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둥지에서 밀어 떨어뜨리지않는다는 점에서 그랬다. 지은 이전에 나는 곧잘 둥지에서 밀려추락했다. - P265

내 남편은 나를 질투해. 그런 감정을 내놓는 사람하곤 못살아. - P270

· 지영아, 자기가 하는 짓, 떠벌리는 말, 그게 다 질투라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사람은 없어. - P271

그런 애도 작가고 그딴 거 쓰는 애한테 굽신거려야 하는 내 팔자좆같다 같은 말을 남기는 상상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일 뿐이다. 그런 걸 더 할 필요는 없겠지………… - P284

‘타인의 마음‘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장소다. 이곳은 때로 천국이고 자주 지옥이다. 가고 싶어서 안달나게 만드는 곳일 때도있고, 끔찍하게 벗어나고 싶은 곳일 때도 있으며, 그보다 더 많은경우에는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미지로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이 타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학습되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고, 학습되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라는데이터가 사실인지 아닌지 파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타인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타인의 마음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걸까. 우리는 어떻게 인공지능은 할 수 없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 P292

이다. 쉬운 마음에 방향이 있다면 정체하는 마음에는 아직 방향이없기 때문이다. 멈춰 있는 마음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많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 P300

-. 짝사랑의 천재는 사랑을 매듭짓지 않는다 - P306

물론 그런 말들을 현실의 내가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엉망진창일 때마다 참아준 여러분 정말 고마워). 나는 흠을 드러내면서도 흠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그것이 나의 가장별로인 점이라는 것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현실에서도 은근슬쩍 티를 내는데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아 소설로도 쓴다. 비뚤어지고 이상한 속마음,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마음, 치고받고 싸워도 용서받고 싶은 마음을 쓴다. - P308

그런데 이렇게 오게 되었다. 책을 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는편집자로 일하는 내내 그것만을 믿었다. 책을 내는 기회는 소중하고, 그것은 쉽게 오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 아니다. 나는 내게 소중하고 또 당연하지 않은 기회가 왔다는 것에 놀라 좋은 일이 다가오는데도 애써 담담한 척했다. 호들갑 떨고 싶지 않아서. 그러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러나 실은 소설집을 내게 되시러게 기뻐도 되나 싶을 정도로. - P3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헌책방이 아닌 대형 서점은 거의 출입하지 않는데, 일단 책값이 비싸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근본적으로는 신간, 베스트셀러, 이런저런 화제성이 큰 책들이 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시간대의 지층이 없이 오직 리얼타임의 사물들만이 가치를 갖는다. - P12

각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옷장이 필요할 만큼 많은 옷을 갖고 있지 않다. 사용하지 않는 난로에는 매혹이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이면 집 외부로 연결된 난로의 연통에서휘파람이나 흐느낌 같은 소리가 밤새도록 들려온다. - P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공에 대하여.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그가 허공을 그리고 있을 때면특히 그 어떤 대화도 참기 힘들어했다고 전해진다.
- 게르하르트 마이어, 곧게 뻗은 운하Der schnurgerade Kana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이너 필링스』는 2020년 2월 25일, 그러니까 코로나19대유행으로 인해 뉴욕시에 봉쇄 조치가 내려지기 몇 주 전에출간되었다. 당시에는 그런 식의 봉쇄가 내려질 것이라고 예상한사람도 거의 없었고, 확산되는 전염병이 우리 국경은 절대로침범하지 않을 것처럼 다들 태연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책이 나온 뒤 일주일 후, 나는 재직하는 대학의 연구실에 나가있었다. 그날 나는 기내용 여행가방을 가지고 출근했는데,
강의가 끝나면 책 홍보를 위해 캘리포니아로 비행할 예정이었기때문이다. 그런데 담당자가 전화로 북투어가 취소됐다고 알려왔다. 그 뉴스를 미처 제대로 소화할 틈도 없이 서둘러 강의실에갔더니 한 학생이 대학 전체가 그날 밤에 폐쇄될 거라는 뉴스가휴대폰에 떴다고 했다. - P9

바로 이 불안하고 사나운 시기에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내책을 읽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내 책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독자가 계속 늘어나면서 『마이너 필링스』는 2021년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줌으로 북토크를 할 때면사회자들은 기막힌 타이밍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즉 아시아계미국인들이 현 상황의 맥락을 이해하고 아시아인에 대한인종차별 급증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언어를 찾으려고 애쓰던 때에 시의적절한 책이 나왔다는 것이다. - P11

사회에 존재하는 그런 흑인에 대한 반감을 지적하고 다른 인종간에 서로 어떻게 연대를 꾸려야 할지에 대해서도 다룬다.
평등을 위한 미국 흑인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우리 부모님을비롯한 수많은 가정이 미국에 이민 올 기회조차 누리지 못했을것이다. - P13

심리치료사의 작고 어둡게 조명된 대기실에는 무릎 꿇은여인이 거대한 카라 꽃바구니를 부여잡고 있는 디에고 리베라의그림포스터를 끼운 액자가 걸려 있었다. 부들이 꽂힌 밤색 꽃병,
캐러멜색 가죽 안락의자, 죽어가는 산호의 색깔을 띤 양탄자.
대기실 전체가 마음을 진정시키는 리베라 그림과 비슷한컬러톤으로 꾸며져 있었다. - P21

자기를 혐오하는 아시아인은 내 세대를 끝으로 사라질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런 생각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가르친 세라 로런스 칼리지의 학생들은 맹렬하여-자율적이고 정치적 참여도 열심히 하고 똑똑했다-참 다행이다,
이 학생들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아시아인 2.0이다,
고함을 내지를 준비가 된 아시아 여성들이다, 라고 생각했다.
또 그러다가도 다른 대학교 강의실에 가보면 머리만 예쁘게매만지고 아무 말없이 생쥐처럼 얌전히 앉은 아시아 여학생들을만나는데, 그럴 때는 닦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 입 좀열어라! 안 그러면 저들에게 완전히 짓밟힌다고! - P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