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 갈 거라고 말했을 때 m은 내게 가우디 평전을 사주었다. 여행 서적도 아니고 웬 평전이냐고 물었더니, 바르셀로나에 가려면 여행 서적보다는 이걸 읽는 편이 좋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여행에서 돌아와서야 읽을 수 있었다. - P151

-왜 그렇게 매번 새로운 취미를 찾는 거야?
라고 물으면- 이 삶이 아닌 다른 삶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라고 답했다. 남자친구는 내 물음에 늘 그렇게 말했다 - P154

투어가 끝날 때쯤 가이드는 맛집 몇 군데를 알려주고는 생각났다는 듯이 근처에 플라멩코 공연장이 있다고 했다. 플라멩코의 절정 부분만 삼십 분 분량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 - P157

얼마나 여행했지?
-한달.
-즐거웠나?
-잘 모르겠다. 이동의 연속이었다.
-여행이란 원래 그렇게 소문 같은 것이지. - P160

그 아래에 사진이 하나 있었는데, 뇌사 상태의 뇌혈류를 찍은것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그건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어떤 도시의 야경 같았다. 중앙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숲이 있는 도시. - P164

‘내가 농담한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는 어때?‘
m은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아마 실제로도 웃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런 농담도 하지 않고. - P166

-두 시간 반이라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라고 내가 말했고 남자친구는-한 사람의 인생이 사라지는 시간치고는 빠르지. - P169

못본 사이 꽤 수다스러워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답신했다.
m에게 묘비명을 만들어준다면 뭐가 좋을까?‘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메일이 와 있었다.
‘당연히, 단 한 번도 바르셀로나에 가보지 못한 사람, 이지.‘ - P173

나는 맥주를 마시며 존에게 답장을 보냈다.
‘해피버스데이, 존.’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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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날은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중국집에서 완탕 수프를 테이크아웃해 집에 가고 있는데 그가 반대편에서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추레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뒤돌아서 먼 길로 돌아갔다. - P175

난 디제이 티모시와는 더 이상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지만, 그날 나를 집까지 바래다준 로니의 인스타는지금도 팔로우하고 있다. 그리고 어딜 가든지 벽화를그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되도록이면 좋게 생각하려는 편이다. - P178

우리 가족의 비공식 가훈,
‘잘난 척하지 맙시다. - P181

그 동생의 예언은 3년 뒤 비가 많이 오던 여름날에현실이 되었다. 마치 진흙 산사태가 나듯이 통제 불가하고, 걷잡을 수 없고, 앞뒤 가리지 못하고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 P183

*말이란 말은 다 하는 것이 엄마의 반응이었다. 반면아빠의 반응은 아무 말 없이 평소 많이 마시지도 않던술을 마시는 거였다. 명목상으로는 연말연시라 술자리가 많다는 것이 핑계였지만 취할 대로 취한 채 귀가해나와는 한 마디 할 일 없이 방으로 직행하기 위해서였다. 아직은 그것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빠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 P192

그랬더니 부산 남자는 크게 당황해했다.
"아, 너무 솔직하시네요. 뭐죠?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차인 것 같은 이 기분은…………"
"근데 동생도 비슷한 생각이지 않아요?"
"네, 사실 그래요." - P198

왜냐하면 나는 잘 알고 있다. 너의 외로움도 내외로움처럼 이름이 없다는 것을. 연애를 못 해서인지, 친구가 필요해서인지, 권리가 침해당해서인지, 존재가 지워져서인지.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외로움. 그런외로움은 몰아낼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만 아는 적당한이름을 붙여주고, 가까이에서 길들일 일이라는 것을. - P199

단골 떡집에서 와서 단골 바에 저녁 8시에 들렀다가 이제 단골 포장마차로 향하는 그들. 그들이 단골 삼는 곳은 그곳이 칵테일 바인지 마을회관인지 분간할 필요가없어서 좋다. B와 나는 단골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반단골쯤이라고는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사이가 됐다. - P212

연애와 술에 대해 글을 쓰게 됐다고 하니 지호가 그랬다. "웃겨, 니가 뭘 안다고 연애와 술로 책을 쓰니?"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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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어느 여름날, 나를 키우던 아픈 사람이앞머리를 쓸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온 세상이 멸하고 다 무너져내려도풀 한포기 서 있으면 있는 거란다.
있는 거란다. 사랑과 마음과 진리의 열차가변치 않고 그대로 있는 거란다.
2022년 12월고명재

늙은 엄마는 찜통 속에 삼겹살을 넣고 월계수 잎을 골고루 흩뿌려둔다 저녁이 오면 찜통을 열고 들여다본다 다 됐네 칼을 닦고 도마를 펼치고 김이 나는 고기를 조용히 쥔다색을 다 뺀 무지개를 툭툭 썰어서 간장에 찍은 뒤 씹어 삼킨다 죽은 사람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 것, 입속에서 일곱 색번들거린다 - P11

AA를 좋아합니다설산을 그대로 받아쓴 것 같아서 - P15

그리고 나는, 함부로 더 이상해져야지꽃술을 만지던 손끝으로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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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건 신의 말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그럼 누구의 말이었다는 거야?" - P31

"용서를 권하려는 건 아니지만, 제 말을 조금 더 들어볼 수 있나요? 곧 퇴근하니까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좀더 얘기해도 될까요?" - P25

그리고 놀란다. 이토록 놀랍고 설레며 기쁜 마음으로 우리는 만났던 것인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둘은 오랜 잠에서 번쩍 눈을 뜬 것처럼 서로를 바라본다. 처음 서로를 마주봤을 때와마찬가지로, 그리고 시간은 다시 원래대로 흐르고, 이제 세번째삶이 시작된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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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에서 왔다 우리의 벌어진 이름은
삐약이라든가 야옹이라든가 은사시나무라든가
엄마— 하고 입 벌리는 무덤 앞이라든가
문자를 버리면 휘발유처럼 번지는 땀띠

고소한 콩물이 윗입술을 흠뻑 스칠 때 엄마가 웃으며 앞니로 면발을 끊는다 나도 너처럼, 뭐라고? 나도, 나도 너처럼, 엄마랑 나란히 국수 말아먹고 싶다 사랑을 줘야지 헛물을 켜야지 등불을 켜야지 예민하게 코끝을 국화에 처박고 싶어 다음 생엔 꽃집 같은 거 하고 싶다고 겁 없이 살 때 소나기 그칠 때 구름이 뚫릴 때 엄마랑 샛노란 빛의 입자를 후루룩 삼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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