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헌책방이 아닌 대형 서점은 거의 출입하지 않는데, 일단 책값이 비싸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근본적으로는 신간, 베스트셀러, 이런저런 화제성이 큰 책들이 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시간대의 지층이 없이 오직 리얼타임의 사물들만이 가치를 갖는다. - P12

각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옷장이 필요할 만큼 많은 옷을 갖고 있지 않다. 사용하지 않는 난로에는 매혹이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이면 집 외부로 연결된 난로의 연통에서휘파람이나 흐느낌 같은 소리가 밤새도록 들려온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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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대하여.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그가 허공을 그리고 있을 때면특히 그 어떤 대화도 참기 힘들어했다고 전해진다.
- 게르하르트 마이어, 곧게 뻗은 운하Der schnurgerade Ka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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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 필링스』는 2020년 2월 25일, 그러니까 코로나19대유행으로 인해 뉴욕시에 봉쇄 조치가 내려지기 몇 주 전에출간되었다. 당시에는 그런 식의 봉쇄가 내려질 것이라고 예상한사람도 거의 없었고, 확산되는 전염병이 우리 국경은 절대로침범하지 않을 것처럼 다들 태연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책이 나온 뒤 일주일 후, 나는 재직하는 대학의 연구실에 나가있었다. 그날 나는 기내용 여행가방을 가지고 출근했는데,
강의가 끝나면 책 홍보를 위해 캘리포니아로 비행할 예정이었기때문이다. 그런데 담당자가 전화로 북투어가 취소됐다고 알려왔다. 그 뉴스를 미처 제대로 소화할 틈도 없이 서둘러 강의실에갔더니 한 학생이 대학 전체가 그날 밤에 폐쇄될 거라는 뉴스가휴대폰에 떴다고 했다. - P9

바로 이 불안하고 사나운 시기에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내책을 읽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내 책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독자가 계속 늘어나면서 『마이너 필링스』는 2021년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줌으로 북토크를 할 때면사회자들은 기막힌 타이밍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즉 아시아계미국인들이 현 상황의 맥락을 이해하고 아시아인에 대한인종차별 급증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언어를 찾으려고 애쓰던 때에 시의적절한 책이 나왔다는 것이다. - P11

사회에 존재하는 그런 흑인에 대한 반감을 지적하고 다른 인종간에 서로 어떻게 연대를 꾸려야 할지에 대해서도 다룬다.
평등을 위한 미국 흑인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우리 부모님을비롯한 수많은 가정이 미국에 이민 올 기회조차 누리지 못했을것이다. - P13

심리치료사의 작고 어둡게 조명된 대기실에는 무릎 꿇은여인이 거대한 카라 꽃바구니를 부여잡고 있는 디에고 리베라의그림포스터를 끼운 액자가 걸려 있었다. 부들이 꽂힌 밤색 꽃병,
캐러멜색 가죽 안락의자, 죽어가는 산호의 색깔을 띤 양탄자.
대기실 전체가 마음을 진정시키는 리베라 그림과 비슷한컬러톤으로 꾸며져 있었다. - P21

자기를 혐오하는 아시아인은 내 세대를 끝으로 사라질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런 생각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가르친 세라 로런스 칼리지의 학생들은 맹렬하여-자율적이고 정치적 참여도 열심히 하고 똑똑했다-참 다행이다,
이 학생들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아시아인 2.0이다,
고함을 내지를 준비가 된 아시아 여성들이다, 라고 생각했다.
또 그러다가도 다른 대학교 강의실에 가보면 머리만 예쁘게매만지고 아무 말없이 생쥐처럼 얌전히 앉은 아시아 여학생들을만나는데, 그럴 때는 닦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 입 좀열어라! 안 그러면 저들에게 완전히 짓밟힌다고!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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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앉아, 자리 맡아뒀어.
외양은 사뭇 달랐으나, 눈썹 문신을 같은 곳에서 했는지 두 사람 모두 눈썹산이 지나치게 높고 색이 진했다. 후에 온 할머니는보행기를 교실 뒤에 세워둔 뒤 나와 헌진에게 늦어서 미안하다 재차 사과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정까지 트로트 경연 방송을 보다늦게 잠들었다며 어제가 진짜 중요한 날이었다 덧붙이기도 했다.
옆에서 여우 목도리 할머니가 한마디 거들었다.
난 임영웅 무대만 보고 잤어. - P239

할머니는 격자로 된 깍두기 노트에 헌진의 말을 꼼꼼히 받아었다. 줌인은 ‘주민‘으로, 슬로모션은 ‘슬로모시기‘로 소리 나는대로 적거나 흘려 쓴 비문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닌데도 그녀는 종종 필기를 멈추거나 난처해하며 내게 ‘해상도가무언지, ‘로 앵글‘과 ‘하이 앵글‘은 어떻게 다른지 질문했다. - P242

이이는 마스크 사면 다 도시 사는 아들한테 보내. 저는 쓰던 거쓰고, 또 쓰고,
뭘 그런 걸 말해. 주책맞게. - P245

긴다. 나는 늘 그런 모녀가 부러웠다. 남편에 대한 험담에서부터불운한 과거사까지 필터링 없이 털어놓는 엄마, 그런 엄마를 가련하게 여기며 해우소 역할을 자처하다 결국 부아를 내는 딸. 남들은 클리셰라고 부르는 모녀상이 내게는 생경하다. 엄마와 나 사이에는 그런 것들이 결핍되어 있다. 애절하고 끈적이는 것. 분노와역정, 유치한 언쟁, 연민이며 사랑 따위. - P350

인물을 잘 모르면 서사는 매끄럽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 P353

엄마의 말은 언제나 행간이 넓다. 그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감정을 짚어내는 건 내 몫이다. - P357

안중정이 눈엣가시와 같은 말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반장은 사흘을 사 일이라 우길 정도의 무식자였는데, 그런가 어떻게 안중정이란 점잖은 멸칭까지 꿰고 있었는지 알다가도모를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면 전에 없이 치열하게 마음을쓰고 머리를 굴리는 모양이라고 가만히 짐작할 뿐이다. - P364

주제는 없습니까?
우리 이야기를 써봐. 개의치 말고 맘껏 싸그리 다.
우리 이야기. 알쏭달쏭함과 막연함을 숨긴 채 겨우 몇 자 적었다. - P372

언니는 말했다. 그래서 자신은 글을 쓰기로 했다고 잘려나가고감추어야만 했던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기 위해.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셋이라 다행이야. 내 문장에 확신도 안서고 불안할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계속 쓰다보면 생기지않을까. 미약한 용기라도 - P381

단단한 어금니로 길게 이어진 사과 껍질을 씹는다. 누구도 먹지않는 그것을 아삭아삭아삭 - P394

소설가가 되면 내가 잘 아는 것들에 대해 쓰겠거니 했으나, 세상이나 사람의 마음은 알면 알수록 어려워 결국에는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 쓰고 있는 것 같다.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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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요. 우리말로 가족. - P136

아이능 꼭 한국인추룩 생경짐기도 물에 시쳐 먹고 국시도 못먹네이………… - P147

마을 어귀는 고요했다. 초입에 고씨 성을 가진 팔촌이 살았는데, 그 집 앞에 트랙터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들어가인사드리자는 것을 겨우 말렸다. 제주 고씨 군자 마을의 노인들은 대부분 ‘고씨 삼춘‘으로 불렸다. 볼레낭 집 고씨 삼춘, 도세기키우는 고씨 삼춘, 갈치 배 타는 고씨 삼춘, 교장 하시던 고씨 삼춘……… 우리 아버지는 박사 똘둔 고씨 삼춘이었고, 당숙은 (마을사람들끼리의 은어였지만) 재혼한 고씨 삼춘이었다. - P151

기럼 저거이 누구 묘입니까?
누게 묘긴 다 헛묘여, 헛묘.
헛묘…………가 뭐입니까?
게나네, 시체가 어성 임시로 맹긴 묘 것이 헛묘. - P152

아버지, 이걸 어떻게 마셔요.
마루에 앉아 손부채질을 하는 삼촌과 그 옆에 멋쩍게 앉아 있는재종숙 부부를 힐끗대며 아버지는 주술 외듯, 최면 걸듯 중얼댔다.
우리집 술은 괜찮다. 문제어서. - P157

삼춘, 야이가 거 어떻합니까. 이는 박사 아니라, 박사 - P163

부군은 연거푸 술을 들이켠 뒤, 떠듬떠듬 사정을 설명했다. - P165

그때까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부군이 삼촌과 아버지를 향해 무릎까지 꿇을 줄, 부인이 그 곁에서 서툰 한국어로 형님, 조카 불러가며 빌게 될 줄, 삼촌이 노발대발하며 기어이 고야가 든 잔을엎는 순간, 아버지가 이때까지 마신 술을 전부 게워낼 줄을. - P168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여전히 한낮이었다. - P171

오수는 기록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 P175

괜찮다 괜찮아. 또 좋지 못한 꿈을 꿔서…………그는 목에 인공후두기를 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말을 할 때마다 성대에서 묘한 기계음이 났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이 쳐졌다.
한 세기를 살아온 사람. 그때까지 나는 그렇게 오래 산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 그저 두려운 일처럼 여겨졌다. - P181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역시도 실크 원단의 아르마니 셔츠를입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며 재킷을 벗은 뒤, 흰 와이셔츠 차림으로 그들 사이에 끼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 P186

암, 자네가 전문가인데 믿고 맡겨야지. 그저 솔직하게만 말해주게. - P197

영식 삼촌에게서 카톡이 왔다.
-두루 잘 사냐? - P211

너 슈바인스학세 먹어봤냐? 난 이번에 처음알았다. 대한민국엔 정말 배달 안 되는 음식이 없더라. - P216

관성이다. 이것도. - P233

이쁘네.
그지? 눈동자가 맑은 게 까풀도 지고.
할아버지는 현진과 내게도 사진을 보여주었다. 손주 사진이라도 보여주는 줄 알았더니 웬 송아지가 가는 다리로 엉거주춤 서있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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