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상에서 땅끝으로 - 로마에서 산티아고 3,018km 순례길
정양권 지음 / 선한북스 / 2021년 8월
평점 :
기독교에서 '땅끝'은 복음이 전파될 장소를 뜻하는데, 개인마다 다르게 의미 부여해볼 수 있겠다. 제목에 그 '땅끝'이 들어가는 여행 에세이를 만났다. 이 책은 목회학 전공 신학생이자 프리랜서 작가인 저자가 2019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밟은 여행기다. 이 책의 서두에 간략한 개념이 정리되어 있다.
'산티아고'는 스페인어로 성스러움을 뜻하는 '산토'와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인 '라고'가 합쳐진 단어로 '성 야고보'를 의미한다. 이 야고보는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이다. 저자의 목적지이자 땅끝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스페인 북동쪽, 갈라시아 지방에 있는 도시이자 성당 이름으로, 교황청에 의해 1189년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3대 기독교 성지가 되었고,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선정과 함께 사람들이 더욱 많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독자들은 저자의 글과 그림뿐 아니라 직접 찍은 사진을 보면서, 로마에서 산티아고에 이르는 여정을 함께해볼 수 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여행의 출발지, 곧 세상이다. 저자는 대성당 축성과 종교개혁 과정을 되짚으며 여전히 '죄와의 전쟁' 중인 우리 시대 '나'의 믿음을 돌아본다. 요한복음 2장의 성전 척결 사건, 성전 된 자로서의 '나'의 모습까지 묵상이 이어진다. 이렇듯 예배자의 삶을 일깨우는 내용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온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를 적용하면서, 각자 받은 소명과 달란트를 자신의 소욕에 따라 쓰는 것과 주의 뜻대로 행하고 사용하는 것을 대비시킨다. 나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로마에서 시작된 여정의 3일째, 저자가 찾은 숙소는 수트리 수녀원으로, 그곳은 카타콤으로 둘러싸인 순교지다. 증인 된 삶이란 무엇인가. 찾는 장소마다 그곳의 역사와 오늘날의 의미, '나'를 향한 질문을 해보는 저자의 서술 방식을 따라가본다. 저자는 르네상스 중심지인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서 여러 조각상을 바라보며 교회와 교인, '나'의 삶에 침투한 인본주의를 경계한다. 이후 바닷가에 인접한 친퀘 테레의 첫 마을인 리오마조레를 지나는데, 사진상으로 보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집들이 인상적이다. 강풍과 해일이 몰아치면 좀 위험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프랑스 니스까지 19일간 저자는 같은 신학교에 다니는 태형과 동행한다. 그런데 니스의 한 초밥집에서 태형의 가방이 없어지고 만다. 순례길 사진이 담긴 스마트폰 두 대, 여권, 현금, 신용카드 전부. 낯선 여행지에서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린다면 정말 당황스럽고 막막할 듯하다. 저자 역시 10여년 전 배낭 여행 때 스위스 제네바에서 여행 가방을 도난당한 일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태형의 여권 재발급 등을 위해 니스에 3박 4일을 머문 후 그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도난 사건은 '여행의 꽃'이라고. 우리가 손에 쥔 것들 모두 사라지는 순간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여행길은 우리 노력이 아니라 미리 예비하신 하나님 은혜로만 채워진다는 의미다. 이 대목을 보면서, 여행길과 인생길, 인간의 욕심과 노력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떠올려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여행 에세이자 동시에 신앙 간증서다.
책 내용 중에는, 길 위에서 배우는 인내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라는 깨달음, 20대 때 붙든 세상의 헛됨과 그런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말하는 대목도 나온다. 물론 간증이나 묵상과 더불어, 순례자의 여정은 계속된다. 저자는 프랑스 '로데브'라는 도시에서 아프리카 여행 때 종종 보던 가택 건물 같은, 빈민가의 숙소를 찾기도 하고, 스페인령인 '카나리아 제도'라는 섬에서 온 순례자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며,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보기 위해 순례길을 잠깐 벗어나 박물관을 가기도 한다. 특히 스페인에서는 길 위의 사람들이 저자에게 질문한다. 어디까지 가는지, 어디서 출발했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순례길 이후 계획이 어떠한지, 하나님을 왜 믿는지,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그런 질문들에 답변하면서, 저자는 자신의 인생 좌표 위에 복음을 또렷이 새겨간다.
저자는 영적 방황을 서른 전에 끝내고, 서른 중반에 도전과 믿음의 순례길을 자처했으며, 그 체험과 심경을 고스란히 글과 그림, 사진으로 담아냈다. 책 말미에는 자신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요약해준다. 하루 평균 몇 킬로미터를 걸었는지, 숙소 찾기와 언어 사용은 어떠했는지, 자신에게 순례길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등. 이 책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려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안내서 역할을 해줄 수 있겠다. 저자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의 국경을 통과해 87일 동안 총 3,018킬로미터를 걸었다. 그리고 현재 <천로역정>을 썼던 존 번연처럼, 일상의 순례길에 서 있다.
여행길의 상징성은 뻔한 듯하면서도 늘 새롭게 다가온다. 비슷해 보이는 여행 에세이들 속에서 저자만의 색과 향이 있듯이. 내가 걸어온 길, 지금 서 있는 길, 땅끝 삼은 길을 차분히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다.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