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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속의 우주 - 서체 디자이너가 바라본 세상 이모저모
한동훈 지음 / 호밀밭 / 2021년 8월
평점 :
'서체 디자이너가 바라본 세상 이모저모'라는 부제가 제목 <글자 속의 우주>를 더 명확하게 만들어준다. 어느새 손글씨보다 컴퓨터 자판이 편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아주 가끔씩 책 속의 좋은 문장을 필사한다. 캘리그래피 책을 보면서 예쁘고 멋진 서체를 따라 써보거나 내 나름의 스타일로 써본다. 네이버가 제공한 기본서체 가운데, 내가 쓴 글에 어울리는 서체를 골라보곤 한다. 읽는 책마다 표지나 본문의 서체가 꽤 자연스럽게 혹은 뭔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서체'에 대한 생각은 이 정도에 머문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의식중에 손글씨를 멀리하는 나 자신을 일깨우고 있나 보다.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접했을 때 꼭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만 봐도 그렇다. 저자가 서체 디자이너라고? 그럼 당장 그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군. 그렇게 기대감으로 펼친 책의 서문에는 예상치 못한 다음 구절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시한이 있다. 아끼고 아낀 글은 걸작의 반열에 오르는 대신 폐기될 뿐이다. 내보내야 할 때 내보내야 한다. 어쩌면 폰트 디자인과 글쓰기가 그 분량이나 결에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를 써서 창조하느냐, 언어의 외피를 창조하느냐가 다를 뿐이다."(8쪽)
글쓰기에 대한 내용이 언급될 줄은 몰랐다. 더구나 폰트 디자인과 글쓰기가 다르지만 비슷한 세계라니! 생각해보니 그렇다. 머릿속의 생각을 담아내는 글, 그 글이 발현되는 형태가 글자 아닌가. 실제로 가독성 있는 글이라고 하면, 문장이나 표현과 별개로 보기 좋은 글자의 조합이기도 하니까. 이제, 내가 모르거나 간과한 글자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본다.
저자는 본격적인 내용 전개에 앞서 용어 구분부터 해준다. 오늘날 글자를 활용한 거의 모든 디자인을 일컫는 '타이포그래피'는, 글자 배치 작업, 캘리그래피, 레터링, 폰트 디자인, 폰트로 만든 포스터와 그 외의 아트워크를 모두 아우른다. 저자는 폰트, 타입페이스, 글꼴, 레터링 등의 개념을 하나씩 알려준다. 다른 문자와 차별화되는 한글만의 특징은, 자소가 결합하는 형태에 따른 '틀'이 나뉜다는 점이다. 글자 주변을 둘러싸는 가상의 틀을 기준으로 정사각형이 아닌 서체는 '탈네모틀', 정사각형 안에 들어가는 글꼴을 '네모틀'이라 일컫는다. '탈네모틀'은 다시 조합형과 완성형으로 구분된다. 저자는 실제 간판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 책에는 저자가 예로 든 사진 자료가 많이 들어 있다. 오래전 주류 광고부터 자동차 트렁크 엠블럼, 가수들의 앨범 레터링, 우리나라 지폐 서체, 수동 카메라의 셔터 다이얼 서체, 올림픽 로고타입 디자인, 여러 간판 및 광고판 등, 저자는 서체에 주목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글자가 들어간 것이면 무엇이든 다룬다는 점에서 전방위적이고, 가령 로고 타입의 변천사 등 서체의 변화를 말하면서 동시에 그 시대까지 읽어낸다는 점에서 일상의 문화사라 할 만하다.
1987년에 발매된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앨범 커버 디자인은 가독성 면에서 아쉽지만 꽤 독특해 보인다. 하단의 담배 꽁초들, 그중 담배 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글자로 표현했다. 저자는 이 곡의 전주를 듣노라면 이른 새벽 홀로 피우는 담배 연기가 떠오르면서, 그라데이션된 커버 레터링이 자연스럽게 매치된다고 표현한다. 개인적으로 간접 흡연도 싫고 그로 인한 연기도 질색이라, 좋아하는 노래를 굳이 담배와 연관시키고 싶지 않다. 아마 지금처럼 금연석이 따로 있고 담배 연기가 민폐인 시대라면 다른 앨범 커버가 나오지 않았을까. 모든 문화 양식은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서체 이야기를 읽으며 실감해본다.
도로, 전철 안의 서체를 들여다보던 저자는 승강장 주변 공사연혁 판에 주목한다. 공사기간이 1980년에서 1985년으로 새겨진 동판은 붓글씨체. 저자는 동판의 마지막 문구 '정성으로 건설하여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는다'를 언급한다. 글자를 보다가 특정 문구를 보게 되고, 이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 '역사의 죄인'이 만들어낸 흔적들도 떠올리게 된다. 글자가 온전히 기능 혹은 외피에 머물지 않는다는 실례가 아닐까. 저자는 야민정음의 세계에 감탄하는 입장으로, 180도 뒤집으면 '사랑해'가 되는 'H워얼V'를 다양한 서체로 변형해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예능 자막 분석이나 대선 포스터 타이포그래피 분석 등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한글 폰트 디자인의 변천 및 한글 디자인의 어려움 등 관련 전공자 혹은 직업군이 보면 좋을 내용도 담았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관심 있는 대상에 오래 시선이 머물기도 할 것이고, 그동안 가볍게 지나쳤던 사물 속 글자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림을 볼수록, 음악을 들을수록 감식안이 생기듯이, 글자도 그렇겠구나 싶다. 이 책을 통해 서체 디자이너의 센스를 엿볼 수 있다. 폰트 디자인과 글쓰기가 비슷하다고 했던 저자 말을 상기해보며, 글자가 주는 끌림, 글이 주는 영향력도 연관지어 생각해본다.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