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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로 가니 - 식민지 교실에 울려퍼지던 풍금 소리 ㅣ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2년 8월
평점 :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의 완결편이 나왔다. 이어령 선생님은 세상에 안 계시지만 선생님이 남기신 생각과 글은 계속 세상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이 시리즈 가운데 '젓가락의 문화유전자'를 다룬 <너 누구니>의 영향 탓일까. 식당에서는 왜 아이를 위한 젓가락 대신 포크만 줄까 의구심을 품다가, 외식을 하게 될 경우 '아이 젓가락을 가져가자'는 생각까지 해본다. '인공지능에 그리는 인간의 무늬'를 다룬 <너 어떻게 살래>를 읽은 다음에는, 아이에게 선생님이 격찬했던 바둑을 가르쳐야겠구나 하고 다짐해본다. '식민지 교실에 울려퍼지던 풍금소리'라는 부제의 <너 어디로 가니>를 읽고 나면 어떤 적용거리가 남을까 하는 호기심부터 일어난다. 물론 우리나라 역사 현장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크다. 그만큼 선생님의 책은 정보와 감성, 일상의 돌아봄, 그 이상을 포괄한다.
이 책은 앞선 시리즈와 동일하게 열두 고개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천자문 고개! 어머니의 말씀 따라 '입춘대길' 한자를 썼던 어린 저자에게, 일본의 '대동아동영권' 여섯 한자는 본의 아니게 저자를 '아시아의 밤', 곧 어둠의 공간이자 아침을 품은 시간으로 이끈다. '조개 패' 자와 '양 양' 자로 설명되는 한자의 문화유전자에서 <천자문>, 일본의 서당인 데라코야 이야기까지 이르면 첫 번째 고개가 끝난다. 일본 글방에서는 아이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했다는 대목이 의외로 다가왔다.
두 번째는 학교 고개! 저자의 추억하는 글을 보면서 감탄하는 지점 중 하나는 세밀한 기억력과 더불어 감성적인 묘사다. 보석처럼 빛나는 무지개색 셀룰로이드 필통, 대양의 남십자성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열대 과일 바나나, 어머니의 목소리를 타고 문명의 향기가 가슴 안으로 번져왔다는 표현 등을 보라. 이 고개에서 학교, 공부의 어원부터 진짜 공부에 대해 놓칠 수 없는 문장들을 만나고, 일본이 1941년 '국민학교령'을 공포했던 역사적 배경, 우리의 서당 교육이 학교 교육과 다른 부분도 배운다. 저자는 문학을 통해 서구 교양을 익혔고 전체주의적 군국주의 사상에 전염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 한국어 고개에서는, 일본의 황민화 교육으로 조선어 교육이 금지된 상황, 실제로 저자가 겪었던 어린 시절 교실 안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네 번째 히노마루 고개에서는 군국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의 정치적 지배 코드인 일장기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이렇듯 식민지 교실의 경험담을 풀어낸 고개까지 넘고 나면, 다음 고개는 무엇이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다섯 번째는 국토 고개! 여기서 저자는 어릴 때 아버지에게 선물받은 란도셀이 얼마나 구속의 사물이었는지 떠올리고, 상자와 보자기로 대별되는 서양인과 동양인의 사고방식 차이를 설파한다. 이어지는 여섯 번째 식민지 고개에서는, 당시 아이들이 배워야 했던 일본 군가의 무의식적 파급력에 대해, 또한 우리의 짚신과 고무신이 가지는 잉여 문화, 곧 획득 방법이 아니라 잉여물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화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또한 일곱 번째 놀이 고개에서는, 넷플릭스의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저자가 했던 유년의 놀이들, 저자가 경험한 도시락 추억을 떠올린다.
여덟 번째 단추 고개는 일본의 제복(교복) 단추뿐 아니라 '샛길' 코너에서 다양한 얘깃거리를 담았고, 아홉 번째 파랑새 고개는 저자에게 중요하게 다가왔던 세 가지 '파랑새' 이야기를 풀어간다. 저자는 우리가 일본 동요 '파랑새'에 주목해야 할 이유를 언급한다. 동요가 군가 되는 것을 막은 일본인들, 일본 내 군국주의를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대항문화를 예의 주시하자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야기인 마테를링크의 '파랑새' 해석을 인상적으로 봤다.
여행의 결과로 무엇을 얻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행의 과정 중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인생의 알맹이가 된다.(228쪽)
저자에게 식민지 시절의 유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일본어를 강요받은 저자가 나중에 일본어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책을 썼다는 자부심도 있었단다.
어둡고 괴로운 기억도 재산이 되고, 불행도 상상력과 창조력을 더하면 행복이 되기도 한다. 그런 자세라면 역경이 와도 견딜 수 있다.(236쪽)
여기까지로 고개가 마무리될 것 같은데 아니다. 열 번째 아버지 고개로 이어진다. 아버지 부재 사회가 되어가는 현실, 허울만 좋고 별로 하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 수탉과 닮은 한국 남자들, 그런 가운데 저자는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며 울었던 닭들,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노래하고 옥사한 문학가들을 열거한다. 이어지는 열한 번째 장독대 고개는 어머니 고개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툇마루를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로 거슬러 올라가는" 장소, 반도의 축소판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고개에서 저자가 '화롯불 이야기'를 한국 고유의 문화유전자로 주장하는 이유를 찾아보라.
보너스 트랙처럼 저자는 책 말미에 "왜 천자문에서는 하늘이 검다고 했을까"에 대해 자세히 풀이해준다. 어릴 때 저자가 서당에서 물어봤다가 혼만 났다던 그 질문이다. 자상한 이야기꾼의 한바탕 강연을 들은 느낌. 이 책에 대한 소감이다. 실제 강연이었다면, 제대로 받아 적지도 못했을 내용들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언제든 꺼내볼 수 있으니 참 다행이다.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