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프로방스에서 보낸 편지 - 마지막 3년의 그림들, 그리고 고백 일러스트 레터 1
마틴 베일리 지음, 이한이 옮김 / 허밍버드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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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반 고흐에 대해, 지난해 미술사학자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화가의 예술에 영감을 준 장소를 따라가며 화가의 행보를 되짚어보는 방식의 글이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가 꽤 많다는 사실에 놀랐고, 언젠가 화가의 편지만 엮인 책을 찾아 읽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훌쩍 흘러 이제서야 화가의 편지에 다시 주목해본다.


저자는 반 고흐 전문가이자 영국의 미술 전문지 기자인 마틴 베일리로, 이 책은 특별히 화가가 프로방스에서 지내는 동안 썼던 편지를 주로 다룬다. 저자가 볼 때, 화가의 걸작들이 프로방스에서 보낸 27개월 동안 그린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즈음 세상에 남겨진 260통 가운데 "일상과 작품에 관한 시각"을 제공하는 내용들로 추려져 있다. 저자는 화가의 기독교식 이름인 '빈센트'로 지칭하며 서술하는데, 이 글에서도 그 호칭을 사용하겠다.



이 책은 크게 빈센트가 프로방스 중앙부에 위치한 아를에서 보낸 편지, 그가 머물던 정신병원이 있던 생레미에서 보낸 편지, 그리고 '추신' 격으로 파리 인근의 작은 마을인 오베르에서 보낸 편지로 구성된다. 서두에 동생 테오를 비롯한 편지의 수령인들이 누구였는지 생몰연대와 함께 간략한 서술을 실어서 독자의 사전 이해를 돕는다.


편지 소개와 더불어 그와 연관된 그림의 완성본뿐 아니라 스케치도 실었다. 해당 그림의 핵심도 언급하는데, 가령 <해바라기가 있는 정원> 드로잉은 빈센트의 걸작 <해바라기> 연작의 전조라고 칭한다. 또한 <빈센트의 침실> 스케치에서는 벽에 어머니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채색할 때는 빈센트가 풍경화로 바꾼 것을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편지와 관련 그림들을 통해, 빈센트의 인생과 예술 세계를 더욱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기를 기대하며, 한 페이지씩 넘겨본다.


화가 동료 베르나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붓이 가는 대로", "본질적인 것을 포착하여"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다. 수필을 "무형식의 형식"이 있는 글이라 칭하듯이, 자연스럽게 그리되 본질을 놓치지 않는 화법이란, 비단 그림에 한정된 내용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내 붓질에는 체계가 없네. 나는 불규칙한 터치로 캔버스를 두드린다네. 그냥 붓이 가는 대로 내버려 두지. (중략) 나는 표현이 되든 안 되든 본질적인 것을 포착하여 드로잉하려고 애쓴다네. 하지만 어떤 경우든 '느끼려고' 하네. 단순화한 색조로 말이야."(49쪽)


베르나르에게 보내는 다른 편지에서, "선과 색채의 예술도 존재하지만, 언어의 예술도 존재하며, 그것은 오래 남는다네."(51쪽)라며 지나가듯 한 말도 인상적이었다. 빈센트의 미술작품뿐 아니라 서간문도 후세에 남게 되리라는 사실을 마치 예고하는 것처럼.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 빈센트의 여러 편지들에서 그 나름의 색채론을 엿볼 수 있었다. "미래의 화가는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은 채색화가'가 될 것"(58쪽)이라는 말이나, 정확한 색채가 아니라 "색이 만들어 내는 조화든 부조화든, 그 효과를 대범하게 과장해야만 해."(72쪽), "나는 진실된 색을 표현하느라 다소 애를 먹고 있어."(82쪽)를 비롯해, 빈센트는 자기 그림의 색조와 그 효과에 대해 상세히 서술한다. 이런 대목을 읽다 보면, 미술작품 감상법을 배우는 느낌도 든다.


색채뿐 아니라 자신이 어떤 그림을 그렸고 어떻게 표현했다는 식으로 써내려가니, 그의 편지는 해당 그림에서 화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셈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의 스케치, 완성본, 화가의 의도 등을 흥미롭게 봤다.


한낮의 햇빛 아래 밀밭에서 그림 작업을 하는 게 "매미처럼" 즐겁다고, 서른다섯이 아니라 스물다섯에 프로방스에 왔어야 했다는 소회를 밝힌 대목도 있다. 사로잡힘, 푹 빠짐, 매혹이라는 단어도 곳곳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빈센트는 예술적 영감을 주는 장소가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 가운데 동생 테오에게 생활비를 받아 사용하던 빈센트는, 저자 표현에 따르면 "다소 순진하게도" 친구와 함께 사는 게 경제적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기다린 친구는 고갱이었다. 함께 지내면서 빈센트과 고갱이 각각 표현한 의자 그림을 대조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반면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의 한 대목에서 쓸쓸한 마음이 스치기도 했다.


"내 그림들이 팔리지 않는 건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언젠가 이 그림들이 물감값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될 날이 오겠지."(125쪽)


이후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지내야 했던 때, 빈센트는 신경쇠약증에 시달리고 앓는 시기 가운데서도 정신병원에서 바라본 풍경, 다른 화가의 작품을 본뜬 그림,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는 그림 등을 그려낸다. 빈센트가 오베르에 머물면서 보낸 편지들 가운데는 그의 사후 발견된 편지들이 여럿 있었다. 이 책에 수록된 마지막 편지 일부를 소개해본다.


"진정성이란 가급적 잘하려고 애쓰는 데만 몰두하는 근면 성실한 정신으로써만이 표현할 수 있다고. (중략) 내 그림들, 나는 그것들에 인생을 걸었고, 내 이성은 그로 인해 반쯤 허물어져 버렸지."(242-243쪽)



이 책을 통해,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프로방스에서 보낸 시기부터 오베르에서 최후를 맞을 때까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작품을 그렸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그가 가족,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희망에 부푼 상태로 작품 이야기를 하는 대목도 있었지만 절망하고 좌절된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대목도 있었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그런 감정의 진폭만큼 다양한 생각과 느낌이 교차될 듯하다.


그의 고단했던 삶과 안타까운 마감이 그가 남긴 작품을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은데, 이 책 덕분에 더욱 세밀하게 빈센트의 편지와 그림, 삶과 예술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아가 진정성과 영원한 가치에 대한 사유로 뻗어가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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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시 - 푸른 별 지구를 노래한 30편의 시 나무의말 그림책 3
하비에르 루이스 타보아다 지음, 미렌 아시아인 로라 그림, 김정하 옮김 / 나무의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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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종종 동시를 읽는다. 이번에는 <지구의 시>를 통해, 지구를 노래하고 묘사한 시 그림책을 만나본다. 학창 시절 따분하게 다가왔던 지구과학 시간, 이 그림책에 나온 시 한 편이 소개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눈을 반짝이며 흥미롭게 수업을 들었을 것이다. 세부적인 과목 구분 이전에, 온 세상이 전부 신기한 아이에게 지구를 감성적으로 접근한 그림책을 보여줄 수 있어서 정말 좋다.


돌고 도는 지구는 팽이 같지만 귤 같기도 하다.('지구는 팽이 같아') 이 시는 재미있는 비유로 끝나지 않는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대해 살짝 덧붙인다. 글작가는 '나침반 없이 동서남북 찾기'도 가르쳐주고, '지구를 여행한 사람들'인 마젤란과 윌리 포그를 소개하기도 한다. 대륙과 나라, 북극과 남극, 바람, 고원, 태양, 물, 곶과 만, 밀물과 썰물, 섬, 화산, 지진, 번개와 천둥, 사막을 다룬 시들도 만나볼 수 있다.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지구과학을 공부하는 셈이다. 시의 내용을 고스란히 형상화하면서 편안하고 잔잔한 색감과 상상력을 더한 그림을 보는 즐거움도 덤이다. 네스호와 괴물, 별똥별과 공룡, 달과 아이를 노래한 시를 보면서, 스토리가 머릿속에 그려지기도 한다. 시적 언어보다 각성을 촉구하는 말들 위주의 시도 엿볼 수 있다. 그만큼 고래가 사라지는 현실은 다급하고('바다의 여왕, 고래') 지구를 구해야 하는 일은 모두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니까.('좋은 지구인이 되기 위한 노력')


지구뿐 아니라 작중화자를 팔레트로 비유하는 시('지구는 팔레트')는 색색의 아름다움을 노래해서 좋았고, 숲을 지구의 폐로 묘사하는 시('숲과 숨')는 당연하지만 자주 잊는 숲의 고마움을 일깨워주어 좋았다. 기묘하지만 사랑스러운 지구의 모습을 서로 이야기해볼 여지를 남기는 시('이상하고 아름다운 지구'), 불편함을 주지만 행복감도 안겨주는 일상의 시('시끄러움과 고요')도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시각을 새롭게 해주는 시 두 편('우리가 보아야 할 것', '다른 세상')은 내게 여운을 주었다.


생각보다 가까이에

수많은 아름다움이 있어요.

아름다움이 우리를 초대해요.


코스모스 한들한들한 들판

희끗희끗 나란히 줄 서 있는 자작나무

해질 무렵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


굽이굽이 강이 흘러가는 풍경

동 틀 때 눈부신 햇살

신발 아래로 뽀드득 밟히는 눈.


-'우리가 보아야 할 것' 일부


시 속에서 만난 아름다운 지구는, 바로 내가 소중한 사람들과 발을 딛고 선 곳이다. 한때는 무심하게 대했던 그 대상이 요즘에는 부쩍 고맙고 안타깝다. 글작가가 지구를 시로 담아낸 의도는 무엇일까. 어쩌면, 독자에게 시인의 눈과 마음으로 지구를 바라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모습을 놓치지 말라고. 그 모습을 우리 함께 지켜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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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리는 날 물구나무 세상보기
사라 룬드베리 지음, 이유진 옮김 / 어린이작가정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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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그림책이다. <여름의 잠수>를 인상 깊게 읽었는데, 그 책의 그림작가가 이번에는 글 작업도 함께했다. 이번 신간은 제목부터 공감이 많이 되더니, 내용도 역시 그랬다.


엄마가 토요일 아침 잠을 깨운다. 노아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 반 아이 알마의 생일 파티에 가야 했다. 엄마와 함께 옷가게에 들어갔다가 재킷을 두고 나오고, 잃어버린 옷을 찾아 되돌아간다. 장난감 가게에서 알마 선물을 고른 다음, 나와서 버스를 타고 가던 중, 모자가 없어져서 그것을 찾으러 다시 길을 거슬러 간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알마의 집앞, 선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후 엄마와 노아 앞에 펼쳐진 이야기는 무엇일까.


무엇인가 깜박 잊어버린 일, 물건을 잃어버린 기억이 꽤 많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무엇이 그리 정신없었을까. 몸과 마음이 분주할 때 혹은 복잡할 때, 당연하고 소중한 것을 잊거나, 일상의 흔적과 추억의 자취를 잃어버리고 만다. 돌아보면 그랬다. 지금도 자주 그런다.


이 그림책으로, 두 가지를 상기해본다. 엄마는 노아에게 말했다. 선물을 어딘가에 놓고 왔을 때나 하루종일 잊어버리는 날을 이야기할 때, "잊어버리자."라고. 이렇듯 정말 잊어야 할 것은, 실수나 한심했던 자신의 모습일지 모른다. 또한 잊어버리는 날, 그 다음에 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 내 안에 가득한 뭔가를 정돈하거나 비우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할 듯하다.


노아가 버스에 두고 내린 알마의 선물은 누구의 차지가 되었는지, 그림책 말미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 그림책을 보면서 소망했다. 너무 자주 하루를 '잊어버리는 날'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최근에 지나간 날들의 기록, 메모를 보면서, 새삼 느꼈다. 부정적인 감정, 에피소드는 참 오래 기억되는구나 하고. 요즘 내게는, 잊어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의 분별과 지혜가 절실해 보인다.


노아 친구의 생일 선물까지 챙기느라 엄마가 정신없구나!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그랬다. 그러다가 그 엄마의 모습에서 나를 보고,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씩 소환해보는 시간! <잊어버리는 날>이 주는 감상이었다. 함께 본 아이는, 특히 만화식 외전 같은 끝부분이 재미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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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박또박 따라 쓰고 뚝딱뚝딱 동시 쓰고 : 초급 1 또박또박 따라 쓰고 뚝딱뚝딱 동시 쓰고
한태희 그림, 백경민 기획 / 책모종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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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처음 말놀이를 할 때 의성어, 의태어가 나와 있는 책을 찾았어요. 그러다가 동시를 읽어주게 되고 동요도 불러주게 되었지요. 한글을 익혀가는 지금, 아이는 여전히 동시와 동요를 좋아해요. 교과서 작품 수록 작가의 동시와 동요를 읽으며 따라 쓰고 나만의 동시를 쓴다니! 이 책 소개를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이가 동시를 감상하고 따라 써보며 나아가 직접 동시도 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정말 좋겠구나 싶었지요.



이 책을 기획하고 엮은 이는, 자녀들의 바르고 정확한 글씨 연습을 위해 동시와 동요를 활용하도록 했답니다. 그 결과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고 글씨 연습도 더 좋아했으며 아이들의 감성 발달에도 큰 도움이 되었대요. 이 책은 유치원 아이들부터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글씨 연습을 할 수 있는 '따라 쓰기'와 동시를 직접 써보는 '동시 쓰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초급 1-5로 되어 있고요, 따라 쓸 수 있는 동시는 한 권당 30편씩 수록되어 있어요. 초급 시리즈 전체는 총 150편이 되겠지요. 따라 쓸 때는, 소리 내어 읽거나 그림을 감상하며 읽고 또박또박 써봅니다. 동시를 직접 쓸 때는, 주어진 소재(한 권당 9개 소재와 '마음대로' 코너)에 맞게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무엇보다 책 판형이 커서 좋아요. 한 작품마다 실린 그림도 예쁘고요, 따라 쓰거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공간도 시원해서 좋습니다. 수록된 동시 중에는 익숙한 노래로 불리는 '송아지, 리자로 끝나는 말, 우리 집에 왜 왔니, 똑같아요, 장난감 기차, 엄마야 누나야, 꼬까신, 새야 새야 파랑새야, 맴맴, 산토끼, 솜사탕, 나비야, 작은 동물원, 원숭이, 꼬마 눈사람, 눈, 고향의 봄, 등대지기, 도롱뇽, 파란 마음 하얀 마음, 나뭇잎 배, 개구리, 산바람 강바람' 등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윤석중 님, 최승호 님, 이상교 님의 동시를 좋아하는데, 그림과 함께 큰 글씨로 보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아이가 낭독하고 써보기에 좋은 크기의 서체, 공간을 갖춘 책입니다.


초급 시리즈에 맞게, 동시 한 편당 분량이 길지 않고 쉬우면서 흥미로운 내용으로 선별된 느낌이에요. 아이는 '치과에서'라는 시가 특히 재미있었나 봐요. 입을 벌려야 하는데 점점 입이 다물어지고, 이를 빼야 하는데 눈물이 쏙 빠진다는 대구가 나오는 동시입니다. '아, 아'나 '으, 으'를 실감 나게 읽어주니 더욱 까르르 웃네요. 실제로 그림 속 아이처럼 이를 빼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마 이 동시가 지금 느낌과는 또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아무튼 아이와 함께 전체 분량을 다 읽어보았고요, 앞으로 하루 한 편씩 낭독하고 바로 옆 페이지에 따라 쓰기로 했답니다.



지금이 9월이니까 올해 남은 네 달, 그리고 해를 넘겨 내년 초까지 다섯 권을 완성해볼 수 있겠어요. 동시를 읽고 글씨 연습도 하고 직접 동시도 써볼 수 있는 초급편 다섯 권이 끝나면, 아이의 말과 생각, 감성이 얼마나 자랐을지 기대감을 가져보게 됩니다. 매일 꾸준히 읽고 쓰고 창작하는 습관이 이어질 수 있기를 옆에서 응원하면서, 저도 함께 필사 노트를 마련해도 좋겠네요.


초급 시리즈에 이어, 중급과 고급도 출간되겠지요? 일단, 지금은 초급 다섯 권에 집중할게요. 책 속에 수록된 동시 가운데 '주머니 속의 가을'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숲에서 온 아이들이

풀어놓는


상수리

한 주먹에


단풍잎

한 웅큼에


하르르 쏟아지는

가을 내음


주머니 속에 데려온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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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로 가니 - 식민지 교실에 울려퍼지던 풍금 소리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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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의 완결편이 나왔다. 이어령 선생님은 세상에 안 계시지만 선생님이 남기신 생각과 글은 계속 세상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이 시리즈 가운데 '젓가락의 문화유전자'를 다룬 <너 누구니>의 영향 탓일까. 식당에서는 왜 아이를 위한 젓가락 대신 포크만 줄까 의구심을 품다가, 외식을 하게 될 경우 '아이 젓가락을 가져가자'는 생각까지 해본다. '인공지능에 그리는 인간의 무늬'를 다룬 <너 어떻게 살래>를 읽은 다음에는, 아이에게 선생님이 격찬했던 바둑을 가르쳐야겠구나 하고 다짐해본다. '식민지 교실에 울려퍼지던 풍금소리'라는 부제의 <너 어디로 가니>를 읽고 나면 어떤 적용거리가 남을까 하는 호기심부터 일어난다. 물론 우리나라 역사 현장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크다. 그만큼 선생님의 책은 정보와 감성, 일상의 돌아봄, 그 이상을 포괄한다.


이 책은 앞선 시리즈와 동일하게 열두 고개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천자문 고개! 어머니의 말씀 따라 '입춘대길' 한자를 썼던 어린 저자에게, 일본의 '대동아동영권' 여섯 한자는 본의 아니게 저자를 '아시아의 밤', 곧 어둠의 공간이자 아침을 품은 시간으로 이끈다. '조개 패' 자와 '양 양' 자로 설명되는 한자의 문화유전자에서 <천자문>, 일본의 서당인 데라코야 이야기까지 이르면 첫 번째 고개가 끝난다. 일본 글방에서는 아이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했다는 대목이 의외로 다가왔다.


두 번째는 학교 고개! 저자의 추억하는 글을 보면서 감탄하는 지점 중 하나는 세밀한 기억력과 더불어 감성적인 묘사다. 보석처럼 빛나는 무지개색 셀룰로이드 필통, 대양의 남십자성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열대 과일 바나나, 어머니의 목소리를 타고 문명의 향기가 가슴 안으로 번져왔다는 표현 등을 보라. 이 고개에서 학교, 공부의 어원부터 진짜 공부에 대해 놓칠 수 없는 문장들을 만나고, 일본이 1941년 '국민학교령'을 공포했던 역사적 배경, 우리의 서당 교육이 학교 교육과 다른 부분도 배운다. 저자는 문학을 통해 서구 교양을 익혔고 전체주의적 군국주의 사상에 전염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 한국어 고개에서는, 일본의 황민화 교육으로 조선어 교육이 금지된 상황, 실제로 저자가 겪었던 어린 시절 교실 안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네 번째 히노마루 고개에서는 군국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의 정치적 지배 코드인 일장기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이렇듯 식민지 교실의 경험담을 풀어낸 고개까지 넘고 나면, 다음 고개는 무엇이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다섯 번째는 국토 고개! 여기서 저자는 어릴 때 아버지에게 선물받은 란도셀이 얼마나 구속의 사물이었는지 떠올리고, 상자와 보자기로 대별되는 서양인과 동양인의 사고방식 차이를 설파한다. 이어지는 여섯 번째 식민지 고개에서는, 당시 아이들이 배워야 했던 일본 군가의 무의식적 파급력에 대해, 또한 우리의 짚신과 고무신이 가지는 잉여 문화, 곧 획득 방법이 아니라 잉여물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화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또한 일곱 번째 놀이 고개에서는, 넷플릭스의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저자가 했던 유년의 놀이들, 저자가 경험한 도시락 추억을 떠올린다.


여덟 번째 단추 고개는 일본의 제복(교복) 단추뿐 아니라 '샛길' 코너에서 다양한 얘깃거리를 담았고, 아홉 번째 파랑새 고개는 저자에게 중요하게 다가왔던 세 가지 '파랑새' 이야기를 풀어간다. 저자는 우리가 일본 동요 '파랑새'에 주목해야 할 이유를 언급한다. 동요가 군가 되는 것을 막은 일본인들, 일본 내 군국주의를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대항문화를 예의 주시하자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야기인 마테를링크의 '파랑새' 해석을 인상적으로 봤다.


여행의 결과로 무엇을 얻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행의 과정 중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인생의 알맹이가 된다.(228쪽)


저자에게 식민지 시절의 유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일본어를 강요받은 저자가 나중에 일본어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책을 썼다는 자부심도 있었단다.


어둡고 괴로운 기억도 재산이 되고, 불행도 상상력과 창조력을 더하면 행복이 되기도 한다. 그런 자세라면 역경이 와도 견딜 수 있다.(236쪽)


여기까지로 고개가 마무리될 것 같은데 아니다. 열 번째 아버지 고개로 이어진다. 아버지 부재 사회가 되어가는 현실, 허울만 좋고 별로 하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 수탉과 닮은 한국 남자들, 그런 가운데 저자는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며 울었던 닭들,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노래하고 옥사한 문학가들을 열거한다. 이어지는 열한 번째 장독대 고개는 어머니 고개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툇마루를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로 거슬러 올라가는" 장소, 반도의 축소판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고개에서 저자가 '화롯불 이야기'를 한국 고유의 문화유전자로 주장하는 이유를 찾아보라.


보너스 트랙처럼 저자는 책 말미에 "왜 천자문에서는 하늘이 검다고 했을까"에 대해 자세히 풀이해준다. 어릴 때 저자가 서당에서 물어봤다가 혼만 났다던 그 질문이다. 자상한 이야기꾼의 한바탕 강연을 들은 느낌. 이 책에 대한 소감이다. 실제 강연이었다면, 제대로 받아 적지도 못했을 내용들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언제든 꺼내볼 수 있으니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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