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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ㅣ 이청준 문학전집 중단편소설 5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얼마전에 한 모임에서 소설을 읽고 느낌을 이야기하는 일이 있었다. 모임의 인원은 약 7명 정도. 우리는 이청준 소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때 한 남자 선생님이(나이는 30대 중반) <눈길>이라는 소설이 아주 재미있다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결코 부모의 도움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남자. 그래서 그 남자는 가난하게 살고있는 어머니에게 절대로 죄책감이 없다. 아니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혼자서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오래되어서 아주 낡고 낡은 서랍장 하나를 두고 사는 어머니에게 결코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는 될 수 있는대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일은 없도록 한다. 어머니가 그렇게 궁색하게 사는 것은 모두 그의 형이 사업에 실패해서 집안을 말아먹었기 때문이고, 형에게 치여 한 번도 자신에게는 변변한 교육한번 시켜주지 못한 어머니에게 자신은 일말의 책임이 없어야 했다.
그가 그토록 그런 사실을 다짐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어머니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 아내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가 살고 있는 시골에 내려가게 된날 밤, 그는 어머니와의 대화가 못내 불편해서 여느때처럼 일찍 잠에 든다. 그런 그가 잠이 깬 것은 한 밤중 어머니와 아내의 두런 거리는 이야기 소리 때문이었다.
...그래서요? 재촉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답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바로 그 날 새벽의 이야기이다. 형의 실패로 시골의 집까지 팔아야 했던 그 때 그는(결혼하기 전의) 시골에 내려갔다. 그러나 이미 그 때 그 집은 팔려 있었다. 어머니는 그 사실을 자신의 막내 아들에게는 숨기고 싶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시골 고향집에서 막내 아들에게 마지막 밥을 지어서 먹이고 싶었다. 그래서 집을 산 사람에게 부탁한다. 아들이 오기로 했으니 그 집에 하루만 있으면 안돼냐고? 아들이 집이 팔린 사실을 모르게 하루만 내 집인척 하면 안돼냐고.
어머니는 집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저녁을 지어놓고. 그러나 아들은 그 집이 이미 팔렸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 그 방에는 낡은 서랍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 날 어머니가 차려주신 저녁을 들고, 그는 결코 책임감에 시달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어머니에게 새벽에 다시 올라가겠노라고 말한다. 어머니는 말리려다가 그리하라고 말씀하신다.
눈이 아주 많이 내려서 소복히 쌓인 새벽, 캄캄한 새벽 아무도 다니지 않아 하얀 도화지 같은 길을 두 사람이 걸어간다. 차가운척 하는 아들과, 아들에 대한 연민과 미안함과 사랑을 시골사람 다운 무뚝뚝함으로 채운 나이드신 어머니...
아무말도 하지 않고 걸어간 두 사람이 정류장에 섰고, 버스가 왔고, 아들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버스에 올랐다. 남은 것은 나이 드시 어머니.
.....그래서요? 어머니 어떻게 하셨어요?
어떻게 하긴. 눈이 쌓이 그 길을 아들이 찍어놓은 발자국만 밟으면서 돌아왔지.
어머니는 아들이 남긴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넣으면서 그 발자국만 찍으면서 돌아왔단다.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는 그 다음 날 올라가야 했다. 아들은 책임감을 느끼면 안돼므로...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 남자 선생님은 울었다. 엉엉. 손으로 벌개진 눈을 닦으면서. 그리고 그 남자 선생님은 자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하셨다. 그 선생님은 다리가 약간 불편한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더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