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나를 위로한다
김선희 지음 / 예담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

 

 

 저자 김선희씨의 소개란에서 공부를 계속하는 이유가 느리고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특이한 이유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자가 발간한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의 목차 중에 위로를 받고 싶은 목차들-현재 내가 직면한 문제들-중에 현실적으로 나와 맞닿아있는 항목들이 많아서 도움을 받고자 이 책을 들었다. 아~ 그렇지만 위로받지 못했다. 자기 계발서들처럼 모든지 가능하다는 거짓의 긍정메시지를 주지도 않고 심리학서적처럼 내 내면을 통해 문제를 직접적으로 물어보지 않는다. 나는 어쩌면 철학자를 통해서 내 문제를 떠넘기고 방임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내 문제를 위로받거나 도움을 직접적으로 받지 못했지만 또 읽다가 내가 왜 이 책을 읽으려고 했는지의 목적을 망각해버릴 정도로 저자의 책은 흥미롭고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 어떤 부분은 어려워서 읽다가 졸음이 온 부분도 있고 어떤 부분은 눈빛을 빛내며 다음 책장을 서둘러 읽고 싶은 조바심이 일기도 했다.

만일 내가 철학자의 통찰력을 빌기 위해 동서양 철학자의 책을 직접 읽으려고 했다면 며칠만에 책을 던져버렸을 것이다. 언어 해석의 바다에 헤매다가 사상의 실마리도 건지지 못하고 난파했을 것이다. 철학자의 눈으로 다른 철학자의 사상을 안내받는 일이 때론 여러 철학자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이 책을 통해 깨닫는다.[철학이 나를 위로한다]는 전래동화와 애니메이션, 만화, 영화등의 다양한 문화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고대와 현대 동서양의 철학자의 사상을 독자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해준다.

똑같은 책과 영화를 봤는데도 내겐 무의미했던 장면들- 아니 그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있었던가?-을 철학자의 눈으로 복원된 장면들은 중요한 삶의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 보게 해준다. 이 책의 역동성은 바로 이것이다.

사랑, 노동, 가족, 변화 ,욕망, 시간의 지배, 자유 ,행복에 대한 굵직한 삶의 문제들. 이런 문제는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대에도 존재해왔다. 다만 문제를 다루는 태도는 사상가들에 따라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그 해법도 당연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귀한 교훈은 문제를 다루고 바라보는 태도이다.

그래도 저자의 모든 생각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저자의 생각에 몇 가지 딴지를 걸어 본다.

나는 왜 일해야 하는가에서 직업을 얻으면 가석방 할 수 있었던 파트리치아가 노동과 자유를 맞바꾸지 않는 사례를 인용한다. 파트리치아에 대한 일화는 이 책에서 처음 들었기에 그녀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녀가 노동 그 자체를 혐오하기보다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강요된 노동이 두렵고 혐오스러운 것이 아닐까?

나름대로 감옥에서의 안정적인 삶을 가석방의 조건으로 직업을 강제 당함이 진정한 노동도 자유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남편을 죽인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그에게 사람과 고통스런 관계를 맺는 노동이 어떤 자유를 가져다 주는지 의문스럽다. 감옥 밖이 더 자유롭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저자는 타의에 의해 혹은 내면화된 권력에 의해 행하는 노동이라면 타인을 위한 노동의 가치 그 자체를 만들 수 없다고 경고하면서도 파트리치아의 노동거부를 단순 노동 혐오로 폄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넉넉한 노후가 보장되면 당장이라고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노동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99%는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생존의 노동(p 57)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특히 자본주의시대에 별다른 자본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돈과 교환한다. 그 교환이 꼭 동등하지도 않다.

대부분은 불평등하게 교환된다. 그리고 그런 불평등한 교환조차 88만원세대들은 보장받지 못하는 불투명한 시대가 되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잉여인간이 만들어지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말 노동을 통해 자기실현을 하고 있을까? 사실 허상이 아닐까? 대다수가 끊임없이 노동하기로 조건 지어진 이 시대에 노동을 통한 자유와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예찬은 한번쯤 의심해봐야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던 부분은 변화에 대한 부분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자기 자신에 대한 결단과 선택에 대한 부분이다. 가장 현실적으로 개인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 더욱 공감이 간다.

p 128,

용기를 가지고 자기가 되기를 선언하고 선택하면서 스스로를 용납하도로 결단하는 것이다.

결단은 단순한 자기 최면과는 다르다.

결단은 또한 체념과는 다르다. 체념은 주어진 조건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더 이상 심리적인 노동을 하지 않겠다는 회피에 불과하다.

p 130

일상의 반복이 우리에게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반복이 자기에게의 불안을 넘어서서 아예 체질을 바꾸어줄 마음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자신이 마땅히 되어야 할 자’로 규정짓는 결단이야 말로 시지프스의 굴레를 가혹한 형벌이 아닌 의미 있는 행위로 변화시킨다.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타자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역사는 미시적으로 ‘인간’과 ‘나’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그 [인간]이란 단어의 의미가 내포하듯 관계 속에 놓여있다.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단 한 개도 없다. 지구와 달과 태양조차도 일정한 인력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 우주의 조건 지어진 환경 속에 인간이 존재하고 ‘나’역시 그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위치지어지고 파악된다.

완벽하게 분리된 ‘나’란 존재는 의미도 없고 불가능하다. 이미‘분리’라는 말은 무엇인가에서 떼어낸 표현이기에 역시 그 자체로 독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런 관계에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끌려 다니면 ‘나’는 병들게 된다.

분열되고 병들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게 던진 질문을 다시 던져보고 여러 사상가의 사상을 통해 내 태도를 점검해보고 사회가 내게 내면화시킨 관념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내가 선택한 나로 살기로, 지금 이대로의 나로 인정하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타자에게 지나치게 예속되지도 나에게만 몰입하지도 않는 일정한 거리두기와 따뜻한 시선을 함께 가져갈 수 있게 결단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에서 조언하는 철학자들도 이 책에 나온 삶의 근본문제에서 온전히 자유롭게 살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한대로 살지 못한 아이러니도 발견한다. 그런 부분에서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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