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잇다
소재원 지음 / 네오픽션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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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자신의 멘토가 누구인지 물어보는 답에 흔히들 간디, 링컨, 김구, 이순신 등 훌륭한 위인들의 이름이 나왔다.
결혼 후 자식을 낳고 보니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의 아버지'로 바뀌었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된 부부싸움, 한밤에 고열로 아이들이 아팠을 때, 힘든 직장 생활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아버지도 이랬을까? 아버지는 어떻게 이런 것들을 버티셨을까? 생각하며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38년 생이신 우리 아버지의 고향이 포천이다. 그 당시 포천은 북한 지역이었다.
한국전쟁으로 피난을 평양으로 가셨다가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는 길이 1.4후퇴였다.
국군들이 13살의 아이가 걸어가고 있으니 국군 트럭에 실어 부산에 내려놓았다고 한다.
홀몸이니 당연히 고아원 생활을 하며 18살에 군대를 가셨다고 한다.
특별법이 만들어져 실향민도 하사관에 지원할 수 있어 하사관으로 복역하셨지만, 한글을 배우지 못하셨기에 승진에 누락되셨다.
군 생활 20년을 앞두고 사직서를 내셔서 국군 연금도 받지 못하시고 퇴직금을 받아 조그만 슈퍼마켓을 내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도매시장에 물건 하러 다녀오시고, 연탄배달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늑막염으로 고생하셨다.
다행히 살고 있던 동내가 재개발되며 보상금으로 작은 2층 상가주택을 구매하여 식당을 시작하였다.
건설경기가 좋던 3년 식당 생활을 하시다 연세가 있어 이도 접고 임대 소득으로 생활하셨다.
그때 나는 대학생이라 남들과 달리 모질게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용돈이라도 벌 요량으로 보건소에서 공중화장실 소독 일을 하셨다.
한나절 일이지만 흠뻑 땀에 젖어 들어오는 아버지에게 시원한 물 한 그릇 대접하지 못했다.
그 이후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자식이 재롱을 떠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 드리는 게 효도라고 생각했다.
명절, 생신, 친구 모임이 있을 때만 부모님을 찾아갔었다.
아버지가 대상 포진에 걸려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를 한참 후에 어머니가 말해 주었다.
왜 빨리 이야기하지 않았냐며 화를 냈지만, 그만큼 내가 무심했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었다.
이렇게 별 탈 없이 늙으실 줄 알았던 아버지가 건강검진을 받다가 종양이 의심된다며 큰 병원에 가라는 소견을 받았다.
대학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듣고 어머니가 전화를 했다. '폐암'이라고......
부모님은 자식이 걱정할까 봐 이 소식도 검사 결과를 받고 서울에 병원 예약해야 한다며 연락한 것이다.
다행히 큰 병원에서 수술하고 회복되어 통원치료를 받을 즘, 아버지를 모시고 변산으로 여행을 했다.
이젠 큰일을 다 겪었으니 행복한 일만 남았으리라 생각하며.
하지만 이번에는 전립선암이 발견되어 약물치료를 하다 식도암이 발견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삶에 효도하는 길은 자주 손자들을 보여드리는 것이라 생각하여 한 달에 한 번 내려갔다.
점점 아버지의 몸이 안 좋아지며 요양원에 들어가시며, 괜찮다며 오지 말라던 아버지......
하루는 찾아뵈는 집에 가고 싶다고 하시는데, 매몰차게 아버지 집에 가면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여기 계시라고 말씀드렸다.
좀 더 따스하게 말씀드릴걸......
퇴근길 버스 안에서 어머니의 전화를 받던 날, 아무래도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으니 얼른 내려오라고.
내려가는 날, 비도 오고 구진 날씨에 평소보다 1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하니 아버지는 의식이 없으시다.
아버지, 저 왔어요. 그 한마디를 해 드리고 눈 뜨시기를 기다려 보았지만, 이내 숨을 거두셨다.
자식이 오기만을 힘겹게 기다리셨나 보다.

'기억을 잇다' 책을 읽으며 내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조금만 더 사셨으면 하는 생각과 왜 그동안 아버지에 대해 조금 더 신경을 써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도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1주일에 한 번 할머니와 외 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전화 한 통씩 할 것을 숙제로 내 주었다.
나도 어머니에게 몸이 아픈 데는 없는지, 혼자 적적하지는 않는지 전화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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