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 - 초상화에 감춰진 옛 이야기
배한철 지음 / 생각정거장 / 201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표지에 나타난 인물화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60을 넘은 듯한 선비의 얼굴, 마치 사진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의 큰 눈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눈빛을 피할 정도로 강렬하게 쏘아 보는 눈빛이
권위적이다.
표지의 주인공은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도암 이재의 손자인 이채로 호조참판, 한성부좌윤을 지낸
분이다.
"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는 초상화가 남아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쉽게 풀어낸 책입니다.
그중에서도 저의 관심을 끌었던 분은 임진왜란의 최고의
영웅으로 중국인 '석성'이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조정에서는 처음부터
"외번(국경 밖의 속지)을 위해 재력을 쏟아부을 수 없다. 조선을 둘러 나누고 적을 막을 만한 사람을 찾아서 그에게 맡기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파병 불가의 목소리가 기본 방침이었다.
또한 오랑캐의 싸움에 대국이 끼어들지 않는다는 원칙도 있었으며, 일각에서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략하려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그런데 명나라 군권을 쥐고 있던 병부상서였던 석성이
"조선이 왜군에 점령되면 왜군은 곧바로 북경으로 쳐들어오게 도리 것"이라고 황제를 설득해 대규모
원병을 이끌어 냈다. 또 왜와의 평화교섭을 주도했던 명나라 사신 심유경을 추천한 사람도 바로 석성이다.
석성은 출생이나 경력 등을 볼 때 우리와 연관될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무슨 이유로 조선에 우호적이었을까?
그 이유는 홍순언과의 인연에 그 배경이 있다.
홍순언은 조선의 통역관으로 종계변무를 해결해 광국공신 2등 당릉군에 봉해진 입지적인 인물이다.
당시 <대명회전>등 명나라의 국가 공식 기록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돼 있어 논란이 생겼다. 이를
바로잡아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종계변무였으며 조선 왕실의 오랜 숙원이었던 이 문제를 처리한 사람이 바로 홍순언이다.
젊은 시절 홍순언은 통역을 위해 북경에 갔다가 한
술집을 찾았다. 미모의 여자를 보고 주인에게 불러 달라고 했는데 이 여인은 난데없이 소복을 입고 들어왔다. 홍순언은 이유를 물었고 여인은 "저희
아버지는 원래 절강 출신으로 이곳에서 벼슬을 했지만 질병을 얻어 어머니와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고향에다 장사를 지내고 싶지만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부득이 몸을 팔아 장례비를 대려고 합니다"고 하소연했다. 여인은 삼백 금이 필요하다고 했고 의기 충만했던 홍순언은 곧장 전재를 풀어 돈을
건넸다. 기대하지도 않은 일에 깜짝 놀란 여인이 "함자라도 알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데도 기어코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다가 성만 가르쳐 주고
술집을 나왔다. 이를 두고 동행했던 이들은 바보라고 웃었다고 한다.
이 여인이 후일 예부시랑 석성의 후실이 된 류 씨
부인이다. 부인은 홍 역관의 은혜를 잊지 못했으며 남편에게도 그러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석성은 이후로 조선의 사신을 볼 때마다 홍 역관이 함께
따라왔는지 묻곤 했다. 그들의 감격스러운 첫 만남이 외교 자료를 정리한 <통문관지>에 상세히 묘사돼 있다.
선조 17년인 1584년, 홍순언은 종계변무사 황정욱을 수행해 중국 땅을 밟았다. 사신단이
북경에 이르러 조양문 밖에 당도하니 비단 창막이 쳐져 있고 기병이 달려와 "예부시랑이 부인과 함께 맞으려고 기다린다"는 전갈을 알려왔다.
예부시랑은 장막 안에서 홍순언을 맞아 "진정 천하의 의로운 이"라고 감사를 표했다. 절을 하는 부인을 홍순언이 만류하자 석성은 은혜에 보답하는
절이니 받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고 두 사람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류 씨는 또 '보은'이라는 글자를 수놓은 비단 수십 필을
선사했으며 남편에게 얘기해 종계변무를 종결짓도록 했다. 류 씨 부인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지원군을 조선에 파견하는 데도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화의가 진행되면서 철병했던 왜가 1598년 협약을 어긴 채 정유재란을 일으키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강화 실패, 막대한 군비 조달 등의 책임을 물어 석성의 관직을 박탈했고 1599년 그는 결국 옥중에서 병사한다. 류 씨 부인 등 가족들은
유배형에 처해진다.
이 과정에서 석성은 조선에 구명 외교를 벌여 줄 것을 간청했으나 외면당한다. 선조는 대신들과 몇
나례 논의한 끝에 명나라 조정이 결정한 일에 대해 입을 닫고 끝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자 석성의 차남인 석재금은 식솔들을 이끌고 조선에 망명한다. 이들은
중국의 본향을 그대로 이어받아 본관을 조주 석 씨라 했으며 석성을 시조로 삼았다. 선조는 석성에게 등을 돌렸지만 그에 대한 제사와 신원 문제는
후대에 끊임없이 논의된다. 정조는 "석 상서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갚지 못 했다 "그의 죽음은 곧 우리 때문이다"라고 한탄했다.
이외에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가득합니다.
조선 최고의 재상인 채제공이 사팔뜨기였다는 점과 명성황후의 사진까지도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마마자국 검버섯, 점, 심지어는 안대까지 그대로 그려 넣은 극사실주의
초상화 속의 인물과
그들의 생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