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건으로 배우는 한국 근대사
김명교 엮음 / 은금나라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중학교를 시작으로 고등학교까지 6년간 역사 수업은 고조선을 시작으로 조선시대까지는 입시를 대비해 무조건 외우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까지 그리고 군사 쿠테타와 민주화항쟁까지 한국 근현대사는 그냥 건너 뛰는 시간이라 딱히 공부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짧은 기간동안 너무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다 보니 이 시대는 외우기를 포기하기도 했었죠.

이 책을 통해 그 많은 사건들에 대해 간략히 요약하여 공부해 보기로 합니다.

 비운의 왕이자 무능한 군주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조선의 강력한 자주를 꿈꾸었고, 조선의 힘을 위해 개화된 문명을 열망했으며, 청의 압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개화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 힘과 일본 공사의 무력까지 등에 업은 개화파는 3일 천하로 끝날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하지만 제대로된 군대도 자금도 실력도 없었던 이들에게 세상은 그리 호락하락 하지 않았다. 무력으로 일본과 개화파를 몰아낸 청나라 세력은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직책의 위안스카이를 보내 조선의 내정 간섭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를 장악해 나간다.

청나라에 조선을 빼앗긴 일본은 우선 조선에서 쌀과 금, 소가죽 등을 매점하는 형태로​ 이권을 장악해 나간다. 더 이상 빼앗길 것조차 남지 않은 조선의 민중에게는 사느냐 죽느냐만 남았다. 이들이 선택한 것은 민란. 드디어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의 봉화가 올랐다.

전주성까지 점령한 농민군에 대항해 중앙군대가 나서지만 결국 동학군을 토벌할 자신이 없으니 청군에 원병을 요청하라는 상소문이 올라온다.

청군의 파병은 일본의 파병도 이어졌다. 갑신정변때 적은 군사력으로 조선을 잃은 일본에게는 절취부심의 기회였다.

하지만 전주 화약으로 동학 농민 항쟁이 가라앉앗으나, 이를 빌미로 조선 땅에 상륙한 청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전우만 짙어갔다.

일본은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조선 임금을 손에 넣고 조선이 '자주국'임을 천명토록해 청나라를 쫓아내려는 작전을 펼침과 동시에 기습으로 청나라 군대를 공격한다.

또한 대원군을 앞세워 청나라에 기대는 민비세력을 제거하고 친일내각을 세워 갑오경장이라는 개혁을 단행한다.

그 개혁은 중국에 대한 조공 중단, 과거 폐지, 노비제도 타파, 일본인 고문관과 군사교관 초빙, 일본 화폐의 국내 통용 및 화폐 제도 도입등을 1차 개혁으로 한다.

청일전쟁 승리 후 제2차 개혁에서는 근대적 상비군의 조직, 경찰제도 확립, 내각 중심 입헌군주제 정부 수립을 꾀하였다.

하지만 민비세력이 러시아 세력에 기대 정치에 복귀하며 배일 정책을 펼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한 나라의 왕비를 시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

 일본은 시해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시해 6일 만에 새 왕후를 간택하여 경복궁으로 입궐시킨다. 이를 호위하기 위해 동별영 군사 800여 명이 경복궁에 도달할 즈음​ 뜻밖의 말이 전해 진다.

"입궐하여 나를 구출하라!는 대군주 폐하의 밀조가 있었다." 경복궁 동쪽 협문인 춘생문을 사이에 두고 공격군과 궁궐 수비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지만 끝내 춘생문을 돌파하지 못했다. ​

이를 계기로 친일 내각은 태양력과 단발령을 강제로 도입하고 독립국가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연호도 제정하였다.

을미사변과 외세의 경제 침탈 그리고 조선의 민족혼이 담긴 전통을 일시에 제거하는 일련의 사태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300여년 만에 의병이 부활한다.

의병의 뒤를 봐주는 세력은 고종과 근왕파 세력이다. 또한 고종은 이이제이 정책으로 일본 세력을 견재할 만한 러시아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기 위해 경기도와 황해도 의병을 지원하며 서울 진공작전을 계획하지만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무력이 여자가 타는 가마를 타고, 아니면 경복궁의 후원에 지하 갱도를 이용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무사히 피신하게 된다.

아관파천의 계기로 일본이 차지했던 경제적 이권 독점은 러시아, 미국, 독일, 영국 등 열강들의 먹이감으로 전락되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을 지내고 경운궁으로 환궁한 지 8개월만에 연호를 광무로 한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이는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 안에서 이루고 있는 팽팽한 세력 균형 덕분이었다.  ​

하지만 부동항구를 원하는 러시아는 느닷없이 청나라로부터 여순과 대련을 조차하여 점거하게 된다. 러시아는 신속한 점거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일본에 양보하는 것으로 일본과 전략적 제휴를 맺는다. 이 전략적 제휴는 오래가지 못하고 일본의 여순항 기습 공격으로 러일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일본은 영국과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러시아의 강력한 발틱함대가 석탄을 공급받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위용을 무력하게 만들어 해상에서 이들을 섬멸하며 러일전쟁의 승전국이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을 중재하기 위한 미국의 도움으로 포츠머스 회담이 열리고 이 회담에서 조선을 일본에 넘긴다는 명시적인 조약에 상호 승인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대한제국의 국체를 철저하게 무너뜨려 식민지로 전락시킨다.

 새로운 근대 국가를 꿈꾸던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지 20년. 외세를 빌려서라도 새로운 나라를 세워보려 했던 젊은 꿈은 그러나 냉혹한 이해가 엇갈리는 19세기 말 열강의 각축 속에 발 디딜 곳 없이 한낱 이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1884년부터 1904년. 그 운명으 ㅣ20년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냉혹한 국제 정세에 대한 대비와 비전 없이, 그리고 경제력을 뒷받침한 리더십이 없는 상태에서 단 하나의 동맹도 없이, 강대국 사이에서 철저히 소외된 조선의 운명은 망국의 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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