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담아낸 것들 - 과거가 얘기하는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우리네 문화 이야기
홍남일 지음 / 플랜비디자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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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과 역사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만나고 나서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렸을 적 보아오던 것들이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플랜비디자인 아니 근래에 들어 가장 유용한 책이었다 꼽을 수 있는 탁월한 책이었다.

여러 가지 배울 것들과 사라져 가는 전통들을 모두 소개하고 싶지만 간략히 추려 몇 가지 소개해 본다.

아리랑

아리랑은 아리랑 후렴이 들어간 민요를 통칭한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만 분분할 뿐 속 시원하게 밝혀진 바 없다.

일부 민요 학자들은 아리랑의 태생을 '메나리'에서 찾기도 한다. 메나리란 한반도 동부에서 논밭을 맬 때 내는 소리로, 일종의 노동요다.

지역마다 각각의 사연을 담아 부르던 지역 아리랑이 한 장소에 모인 적이 있었다. 경복궁 재건이 한창이던 1860년대 후반이다.

공사 노역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인부들이 동원되었는데, 그들의 입을 통해 자신들 고향의 아리랑이 어우러졌다. 그런데 여러 아리랑이 합쳐지다 보니 그때까지 생각지 못한 새로운 정서가 각지 사람들 가슴에 움텄다. 바로 아리랑이라는 것을 통하여 '우리'라는 동질의식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1894년, 탐관오리의 수탈과 일본의 침략 야욕으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동학 농민들이 죽창과 낫을 들었다. 이때 군가 역시 아리랑이었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뺏기자 아리랑은 민족 저항의 노래로 자리를 굳힌다. 이들 중에는 광복군이 되어 총칼을 앞세우며 광복 아리랑으로 전열을 가다듬기도 했다. 1926년에는 그야말로 민족 전체를 아리랑으로 묶는 사건이 생겼다. 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을 만든 것이다. 1929년, 광주 학생의거에서 아리랑이 점화되자 일본은 서둘러 아리랑 금창령을 내린다. 그리고 마침내 해방되자 한민족 누구나 할 것 없이 아리랑을 목청 터지게 불렀다. 노동 민요에서 민중 노래가 되고, 저항하던 민족의 노래가 된 아리랑. 故 양주동 박사는 아리랑의 '아리'는 '우리'의 다른 말이라 하며, 아리랑 고개는 수난의 어려움을 견디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 광명의 고개라 하였다. 외국의 어느 학자는 아리랑을 한 민족이 상상 속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주문이라고도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아리랑을 부를 것이다.

동지는 작은설

설은 '처음', '으뜸', '시작'의 뜻이 담겨 있다. 이십사절기 중 하나인 동지는 양력 12월 22일 무렵으로,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지만, 이날을 기점을 ㅗ낮이 다시 길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양력의 새해 첫날인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지를 작은설이라 부르며 명절로 삼았다.

"동지를 지나야 한 살을 먹는다, 동지 팥죽 먹어야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라는 익숙한 표현을 보더라도 동지를 한 해의 시작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설 동요로 자주 부르는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에요."에서 까치설날이란 바로 동지를 말하는 것이다.

동지는 분명 작은설이며, 한자로는 아치(亞稚)로 불렀다. 아치가 시간이 흐르면서 까치로 치환되어 까치설이 된 것이다.

아무튼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 먹고, 새해 달력을 만들어서 이웃들에게 서로 나누어 주는 풍습이 있었다.

최초의 대중교통사고

전차는 독일 지멘스 사가 1881년 개발했을 때 최첨단 교통시설이었는데, 이것을 미국의 콜브란이 고종에게 소개하며 조선에 도입되었다.

기공식은 1898년 9월 15일, 경희궁 흥화문 앞에서 열렸고, 이듬해인 1899년 5월 17일 동대문에서 개통식을 했고, 5월 20일에 동대문과 경희궁 사이를 시험 운행하였다. 처음엔 대중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전차의 최고 속도를 시속 오 마일로 운행할 것이며, 그 뒤로는 시속 십오 마일은 초과하지 않은 것을 운행 규칙으로 삼았다. 전차가 정상 개통되자 그야말로 인기 폭발이었다. 객석은 상등 칸이 삼 전 오 푼, 하등 칸은 일 전 오 푼으로 당시 쌀 일 킬로그램 가격이 사 전에서 오 전인 점으로 미루어 꽤 비쌌다. 이렇게 전차를 타 본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을 일삼자, 돈 없어 탈 수 없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전차가 부럽다기보다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며 싫어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전차가 개통되던 해에 극심한 가문이 들어 민심은 흉흉해지고 전차로 인해 가뭄이 들었다는 뜬소문이 퍼져나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급기야 분노의 불을 지피는 사건이 터지고 만다.

1899년 5월 26일, 동대문에서 종로 포진 거리를 지나던 전차에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가 치여 죽는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한국사에서 대중교통수단에 의해 일어난 최초의 교통사고로 기록된다. 서울 시민은 난생처음 본 처참한 광경에 흥분하여 전차에 돌을 던졌고 일본인 운전수를 죽여야 한다고 몽둥이를 들었습니다. 놀란 운전수와 차장은 재빨리 도주하여 화를 면했지만 성난 군중은 이 전차에 불을 질러 완전히 파괴하고, 그래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자 뒤따라오던 전차까지도 뒤집어 놓고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책을 통해 우리의 역사와 전통, 생활 양식까지 다양한 방면에 지식을 넓힌 책이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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