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멩코 추는 남자 (벚꽃에디션)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올해 여름휴가를 전주로 다녀오며 최명희문학관을 들렀다. 작은 초가집을 개량해 문학관을 만들었는데 도슨트 설명도 없이 전시된 그녀의 작품들만 둘러보고 나오려니 왠지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인지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란 타이틀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작가는 60대 후반의 포클레인 기사 허남훈을 주인공으로 그의 삶을 잔잔하게 들려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남훈 씨, 그는 동료들과 술자리를 갖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술이 점점 늘어 알코올 중독에 이르기까지... 그러는 동안 첫 직장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도 했고 딸까지 있는 가장이 되었다. 월급은 족족 그의 술값으로 나가니 아내는 더 이상 그와의 삶을 이어갈 수 없다는 선언과 함께 이혼을 하게 되었다. 혼자가 된 그는 점점 더 술에 의존하게 되었고, 외상 술에 간신히 하숙비만 내며 살아가는 막장 인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떡이 되어 피를 토하고 누워 있는 것을 하숙집 주인이 신고해 응급실에 실려가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간이 안 좋았던 남훈 씨는 술을 더 먹으면 죽을 수 있다는 의사의 권고에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문구점에 들러 제일 비싼 노트를 사서 작은 꿈들을 적어 나가기 시작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애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당한 여자와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기적처럼 아이를 갖게 되었다. 새로운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는 포클레인을 몰며 공사장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벌이가 늘어나게 되었다. 집도 장만하고, 포클레인도 장만하고, 어렵게 태어난 딸아이 학원비에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도 시키지 않고 공부만 시켰다. 그런 딸이 이젠 교사가 되어 인생의 후반기를 멋지게 보내기만 하면 되는 시기가 다가왔다.

60대 후반 그는 가족들에게 은퇴를 선언하며 직업 전선에서 물러났다. 하루하루 무료하게 지내던 남훈 씨는 젊을 시절 꿈을 써 내려갔던 노트를 발견하고 그때의 꿈을 이뤄보기로 작정했다. 영문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남훈 씨는 영어보다는 색다른 언어를 배우고 싶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다. 나름 장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주어+동사+목적어 순으로 말하는 스페인어에 이끌려 학원에 등록하게 된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스페인으로 여행 갈 계획을 세우며 스페인의 춤인 플라멩코도 배우려 학원에 등록한다. 이렇게 젊은 날의 꿈을 이뤄가며 가슴속에 숨겨둔 첫아이를 떠올리며 그녀를 찾으려 노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포클레인 렌털해 준 늙다리 총각과 스페인어 강사 그리고 플라멩코 강사의 도움으로 용기를 얻어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무작정 첫 딸인 보연이가 사는 연립주택에 가서 기다려 보기도 하며 그녀의 앞에 당당히 나서 볼 것을 꿈꿨지만 30여 년의 시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를 처음 본 보연은 모멸 차게 그를 외면했고 오히려 쓴맛을 본 남훈 씨는 그래도 용기를 내어 우편함에 꽂힌 우편요금 청구서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기록하고 돌아오게 된다. 서로 떨어져 지낸 시간만큼 이들의 재회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3개월 만에 보연의 집 근처의 돈가스 집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게 된다. 남훈 씨는 16살 이후 처음 마주 앉아있던 자리가 어색했지만 보연은 처음으로 아빠와 식사한 것이 돈가스이기에 돈가스 집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괜스레 미안함을 느낀다. 보연의 존재를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던 남훈 씨는 아내와 딸에게 이 소식을 알리게 되지만 급작스러운 소식에 딸아이는 혼돈의 시간을 갖는다.

​보연과 떨어져 지낸 시간만큼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남훈 씨는 보연과 함께 스페인 여행을 계획한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여러 곳을 방문했지만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둘 사이의 간격은 쉽게 메꾸어지지 않았다. 스페인의 전통 시장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보연과 떨어지게 된 남훈 씨.

이 먼 곳까지 와서 언어도 통하지 않는데 보연이 사라지게 되자 눈앞이 막막해진 남훈 씨는 보연이를 찾아 곳곳을 헤매기 시작한다. 처음 헤어진 곳으로 다시 돌아와 보니 작은 성당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보연을 발견했다.

"이놈의 계집애, 대체 어디를 갔던 거야?" 애타는 마음만큼 짜증이 먼저 올랐지만 보연은 그런 아빠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여행 기간 내내 말도 없고 서먹했던 관계로 인해 이젠 더 이상 부녀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겠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서로에 대한 오해와 어색한 기분을 대화로 해결한 부녀는 다음날부터 조금 더 서로를 챙기는 여행을 시작했다. 광장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 미리 준비해 간 정장에 멋진 모자를 쓴 남훈 씨는 플라멩코 공연단과 함께 거리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보연의 얼굴에는 함박 웃음꽃이 피어나게 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남훈 씨는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공사장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공무원으로 퇴직하고 요양원에서 일을 하는 아내에게 안식년을 주었고, 둘째 딸은 24살의 젊은 나이에 결혼할 남자를 데리고 왔다. 남훈 씨의 일상은 젊은 날들의 꿈이 하나 둘 이뤄지며, 마지막으로 보연과 한 달에 한 번은 꼭 만나기 약속을 지키며 소설을 끝마친다.

어색한 중년의 아버지를 주제로 그의 삶의 이야기를 잔잔히 들려주며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 소설. 여성 작가 특유의 상황 설명도 없고 빠른 전개로 읽는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근래에 들어 가장 좋았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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