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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 왜 사는지 모르겠는 나를 위한 철학 수업
박연숙 지음 / 갈매나무 / 2021년 8월
평점 :
오늘 밤 자는 동안 죽을지도 모른 채 잠에 들지만, 아무런 걱정 없이 아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당연한 듯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며 곳곳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지만 나와 상관없다는 듯 살아간다. 가끔 안면이 있는 사람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을 때면, "안됐네!" 짧은 한탄과 함께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나와 관계된 친인척이나 친구의 죽음 앞에서는 그들을 잃었다는 슬픔과 절망에 삶이 무너져 내린다. 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억지를 부리는 것일까?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므로 우리 모두 언젠가 죽음이라는 종말을 필연적으로 맞이한다. 죽음으로 맞이하는 이별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설령 죽음 이후에 다시 만날 것을 확고히 믿는 종교인이라도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고통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사람은 늦어도 여섯 살에는 자신의 부모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나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될 때 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처음에는 이러한 충격과 두려움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의식 밖으로 밀어내 억압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면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다른 누구의 죽음이 아니라 나 자신의 죽음 앞에서 공포에 떨지 않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나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죽음은 혼자 맞이하는 것이지만, 죽음이 있기에 일상의 세계에서는 알지 못했던 자신의 고유한 삶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의미를 더 깊이 파고들수록 반대로 유한한 시간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죽음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죽음을 알아갈수록 삶이 보인다. 인간의 유한성을 가장 확실하게 깨닫게 해 주는 사건이 바로 죽음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유한한 삶과 죽음은 서로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을까?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내가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고, 내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없는 나의 고유한 특성을 지니며 사는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다른 사람들, 다른 존재들, 지구 생명체들과의 관계에서 인식하고 그 의미를 찾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평화롭게 살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삶에 부여하는 의미가 죽음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의미와 삶의 의미가 다를 리 없다.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고백할 때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한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어느 한순간도 붙잡을 수 없음을 아는데 왜 우리는 그런 말을 하는 걸까? 그저 하나의 과장일 뿐이고 수사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걸까?
우리는 모두 유한한 삶을 살다 죽지만 자신의 삶에서 하나의 의미가 되는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하나의 경험으로 간직한다면 생명의 유한성을 넘어설 수 있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이자 진리인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늙는 것을 싫어한다. 노년을 젊음의 상실, 가능성의 상실로 생각하면 나이가 들수록 불안하고 초조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가에 달렸다. 인간은 자기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존재이다. 노년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전체적인 가치 체계에 중요한 요소이다. 죽음은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일이고 순수한 영혼이 되는 일이므로 기꺼이 반길만한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기에 죽음에 대한 태도가 급격하게 변화했다. 생명체라면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것이 죽음인데, 이 시기에 이르면 죽음은 회피되고 금기시된다. 도시화, 핵가족화가 심해지면서 임종의 순간을 가족 모두가 함께하기가 어려워지고 지금까지 삶의 대부분을 살아왔던 공간에서 격리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때문에 죽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기회가 줄어들었고 이와 더불어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가치와 슬프고 억눌린 분위기의 죽음이 맞지 않아 회피 대상이 되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음 이후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난 적은 없으므로, 죽음을 현실과의 단절이자 현실에서 누리던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벽'으로 여기면서 죽음을 거부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 이후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 완전한 사라짐으로써의 죽음과 다른 세계에서 계속 사는 것으로서의 죽음 모두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기꺼이 바라는 바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렇듯 두려움에 떨며 끌려가듯 죽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반기듯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불행과 고통이 닥치더라도 시간의 힘을 믿고 견디며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해야 자신의 명을 따르는 좋은 삶을 살고 좋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운명은 손 놓고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삶을 사랑할 때 만날 수 있다. 좋은 죽음은 한 사람의 몸의 기능이 정지되는 일이 아니라 개인의 마음을 넘어 우주의 마음, 자연의 이치로 시야를 넓혀 준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죽음은 결코 갑작스럽게 닥친 비극적 사건이 아니라 무한하고 근원적인 것과 하나 되는 반갑고 좋은 일이라는 반전이 생겨난다.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글을 통해 죽음에 대한 통찰을 한 권의 책으로 옮겼다. 죽음을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삶의 종착역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