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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 왕과 사대부, 그리고 사관마저 지우려 했던 조선 최초의 자유로운 사상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4월
평점 :
중고등학교 6년간 역사 수업을 들었지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 윤휴.
내가 처음 윤휴 선생을 알게 된 것은 경기도문화재단의 역사탐방에서 의정부에 있는 서계 박세당 고택과 묘를 찾았을 때였다.
'사문난적(斯文亂賊)' 성리학 또는 유교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 또는 사상을 비난 또는 공격하는 용어이다. 비난이나 공격할 때 쓰는 용어이기에 그리 위협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살생부나 마찬가지였다.
우암 송시열, 그는 주자학과 예학의 대가로서 그의 주장은 곧 법이었다. 그가 사문난적으로 지목한 박세당과 윤휴. 그들은 결국 정치적 보복과 무고로 유배되었고 심지어는 사약까지 받아 삶을 마감했다. 그들의 사상이 어떠했기에 그러했을까?
윤휴
그는 임금과 백성과 학문을 너무도 사랑했고, 평생 일관되게 도를 추구했다.
송시열은 주희를 성현의 반열에 올려놓고 그의 말이나 글은 일점일획도 고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주자 절대 추종론자였다. 주자학자들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윤휴는 백성을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 이외의 천하라고 여겼다. 자신과 백성 사이에 계급적 차별이 없는 것이다. 윤휴에게는 주자는 상대적 가치를 지닐뿐이었다. 그렇기에 사문난적이 되었다.
윤휴는 청나라에서 벌어지는 삼번의 난을 이용해 반청 연합 전선을 구상하여 청나라를 도모할 수 있다는 전략을 내놓았다. 윤휴, 그의 길에 북벌대의가 있었다. 그 순간 말로만 북벌을 외치던 세력에게 그는 정적이 되었다. 북벌을 단행하기 위해서는 국력이 강해야 했다. 임란 당시 류성룡은 면천법을 시행하여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 의병으로 말미암아 나라를 구했다. 민부가 곧 국부라고 생각했던 윤휴는 민부를 달성하려면 양반들의 계급적 특권이 폐지되거나 축소되어야 했다. 이런 생각에서 윤휴가 주창한 법이 바로 지패법(종이로 만든 신분증 제도)과 호포법(양반도 군포를 납부하는 제도) 이었다. 윤휴는 호패법과 지패법을 시행함으로써 신분제를 폐지 내지는 완화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예론을 강화하고, 신분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해서 혼란을 극복하려 했다.
윤휴, 그의 길에 백성들의 민폐 해소가 있었고, 신분제 해체가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윤휴, 그는 적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사약을 마셔야 했고, 마지막 유언도 남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시대의 금기가 되었다.
예송논쟁
자의대비 복제가 1년인지, 3년인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효종의 왕권을 부정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왕이 아닌 사대부의 죽음이었다. '체이부정(體而不正)' 서자를 후사로 삼은 경우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지 않는다고 해석한 것이다. 자신들이 한때 군부로 모셨던 효종은 송시열과 송준길에 의해 서자로 전락했다.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 이후 그들은 조선의 왕을 자신들과 같은 명 황제의 신하로 생각했다. 이런 견해 충돌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조선 왕실을 절대적인 왕실로 인정하는 남인들의 견해와 조선 왕실을 명 황실의 신하로 인정하는 서인들의 견해가 복제를 계기로 드러난 것이다. 나라보다 당이 중시되는 시대, 군부보다 당수가 중시되는 시대, 국왕보다 스승이 중시되는 시대, 옳고 그름보다 유불리가 중시되는 시대였다.
윤휴는 약 5년 정도 벼슬에 있었지만 실제 벼슬에 있은 기간은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줄기차게 주장한 것은 북벌과 민생의 폐단 해소였다. 이런 윤휴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서인들의 생각이었다. 감히 주희에 맞서면서 사상의 자유를 논하고, 사대부의 특권을 폐지하려 한 윤휴를 살려두어서는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을 계속 누릴 수가 없었다.
다시는 윤휴 같은 인물이 출현하지 못하게 싹을 잘라버려야 했다. 서인들은 윤휴의 죄를 만들었다. '대비를 조관하라'라는 단어를 억지로 해석하고, 도체찰사부가 설치될 때 부체찰사가 되기를 원했다는 것이 그의 죄였다. 이는 위로는 조선 국왕을 압박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억압하면서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영구히 잇겠다는 서인들의 전략이었다. 그러면서 윤휴의 북벌론을 송시열 등이 주장한 것으로 역사 바꿔치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서인은 노론이 되었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집권하고, 조선이 멸망할 때는 일제에 가담했고, 6.25이후에는 친미주의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