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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지나간 세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부키 / 2021년 1월
평점 :
큰 키에 말끔한 양복 차림, 흰머리에 샤프한 인상까지. 거기에 대형 꽃다발을 들고 퇴근하는 노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시선이 갈 법하다.
다케와키 마사카즈, 그는 40여 년간 몸담았던 회사에서 정년퇴직하는 날 송별회에서 받은 꽃다발을 들고 지하철에 올랐다. 회사의 중역으로 송별회 날 회사에서 차를 보내주었지만 그마저도 폐를 끼친다며 사양했다.
우리 아버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40여 년간을 일을 우선시하며 살아왔다.
그들만의 세계였던 회사에서 나온 그는 앞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앞섰다. 하지만 마지막 퇴근길이 인생의 마지막이 될 듯하다.
출입문 근처에 서 있던 다케와키는 갑작스러운 두통과 함께 지하철에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갔다. 너무 높은 혈압에 뇌혈관이 터져 수술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의식은 살았으나 몸은 겨울잠처럼 아무 반응이 없다.
응급실에서 생명 보조 장치로 연명하던 다케와키에게 80대의 할머니가 찾아왔다. 실제 인물이 아닌 다케와키의 뇌 속에서 영화처럼 펼쳐지는 생각을 이야기로 정리했다. 우아하게 나이 든 파리지엥의 노인, 그녀와 함께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거리를 걷는다. 그녀는 4일 동안 쓰러져 있어 음식을 먹지 못했던 다케와키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준다. 신주쿠까지 이동하려는데 다케와키는 죽음의 문턱이었던 지하철로 신주쿠까지 이동하자고 제안한다.
신주쿠의 맛집에서 그녀가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데 모든 것이 다케와키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그녀가 어떻게 그의 식성을 알았을까?
다케와키 그는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부모 얼굴도, 출생연월일도 모른 채 보육 시설에서 자라났다.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했던 다케와키는 장학금을 지급하는 공립 대학교에 입학했고, 대기업에 입사하며 남들과 동일한 출발선에 드디어 서게 된다.
두 번째 환상, 그는 잔잔한 해변 가에 도착해 있다. 아내와 딸아이가 해변에서 놀고 있다. 그런데 먼 해변가 카페에서 60대 정도의 여성이 다케와키에게 손짓한다. 아직까지도 그는 이 여성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아마도 부인의 헬스클럽 멤버 중 하나라고만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시원한 음료수를 서로 나눠 마시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세 번째 환상, 사카키바라 가쓰오라는 중환자실 옆 침대의 노인이 나타났다.
팔십 대 중 후반으로 가족이 있지만 혼자 살고 있는 사카키바는 매일 같이 출근하는 곳이 이 병원이었다. 60대 협심증으로 생명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뇌출혈로 생명의 오락가락하고 있다. 그와 함께 인근의 목욕탕을 찾아 그의 옛이야기를 듣게 된다. 원자 폭탄으로 부모도 그날의 기억도 잊은 사카키바.
어린아이가 혼자 살아가기 위해선 작은 것부터 훔치는 것을 시작했다고. 그때 그들의 우두머리 여자 미네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와 연이 닿지 않았고, 그 후로 찾으려 노력했지만 행방을 알 수 없다고...
이젠 시간이 얼마 없다. 다케와키의 생명줄이 끝을 행해 달려가고 있다.
마지막 환상, 그는 또다시 지하철을 타고 있다. 그곳에서 미네코를 기다린다.
열다섯의 미네코는 갓난 아기를 안고, 짐 보따리를 목에 멘 채 지하철에 올랐다. 축 늘어진 스웨터에 짧은 치마, 맨발에 게다를 신은 여성. 다케와키도 그녀를 돌봐주고 싶지만 인파 속에 묻혔다. 한산해지는 지하철 속에 그녀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그녀를 돕고 싶지만 지하철의 느슨한 공기에 졸음이 쏟아진다.
몇 정거장이나 지났을까, 지하철 안이 소란스러워 눈을 떴다. 십대의 미네코는 보이지 않고 아기만 의자에 놓여 울고 있다. 그의 기억 속에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벚꽃 색깔의 보자기가 아기 옆에 놓여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를 찾아왔던 3명의 여성은 모두 미네코였다. 그리고 그녀는 다케와키의 생모였다. 눈앞에서 생모를 놓쳐버린 다케와키에게 4살 때 사고로 먼저 떠나보낸 아들 하루야가 나타난다. 지하철 대합실에서 혼자 떨어져 쓸쓸히 지냈을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하루야를 따라 전철에 타려 한다.
하지만 하루야는 자신은 남자이기에 아직까지는 견딜만하다고, 엄마와 동생 그리고 동생의 세 딸들을 더 많이 사랑해 주라는 당부를 남긴다.
태평양 전쟁 후 전쟁고아와 그 아들의 삶을 다케와키라는 노인을 통해 잔잔히 보여준다. 그 당시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정보다는 일이 그리고 직장이 우선이었던 우리들의 아버지의 삶. 자신을 버린 부모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잊히지 않는다.
그 갈망들이 환상을 일으키며 못다 한 모정을 느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