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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평점 :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어보고
작성한 포스팅이에요.
#이언매큐언 #장편소설 #레슨 #자전적소설 #자전소설

...그는 자꾸만 틀리는 부분에 이르기도 전에
악보에서 그 부분을 볼 수 있었다.
일이 벌어지기도 전에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실수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p.14
롤런드(주인공이름이 하필 디지털 피아노를 떠오르게 하는 ROLAND와 이름이 비슷한 건, 그냥 나만 연관을 짓는 거겠지?^^)가 받는 레슨으로 시작하는 이 장면을 읽으며 어릴 적 받았던 피아노 레슨을 떠올렸다.
이 부분을 읽으며 틀렸을 때 아찔함이 단박에 기억났다.
틀릴 곳이 오기 전에 느껴지는 긴장감,
'아! 이번에도 망했다!'하는 절망감...
그 긴장감을 잡아내서 이 책이 궁금했었다.
음악과 관련된 소설인 건가?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은 서른 일곱으로 훌쩍 커버린 동일 인물, 롤런드의 아내가 집을 나가고
남긴 쪽지를 읽는 장면이었다.
두 가지 장면의 시작은
내게 의문만 남겼다.
'왜 남자애 다리 안쪽을 꼬집어?'
'키스는 웬 말인가?'
'당신 잘 못 아니라면서, 사랑한다면서 영원히 왜 떠나는데?'
700여 페이지의 묵직한 책,
그리고 자꾸 질문만 하게 하고 명쾌한 답은 뒤에 감추고 있는 것만 같아
개운치 못한 답답한 안갯속을 지나는 듯 책을 읽었다.
학교를 다니게 된 어린 시절의 롤런드,
그리고 집을 나간 아내의 행동에
속절없이 남겨진 아들 로런스를 키우고 살아가는 롤런드
작가는 롤런드의 이 두 모습의 전후 과정을
간결하고 무심해 보이게 그러면서도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한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서서히 그렇게 되게 되고 말았는지 ...
페이지 수가 어마어마한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의 서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세계대전, 베를린 장벽 붕괴, 체르노빌 원전, 코로나19유행 등
굵직한 역사가 한 사람뿐 아니라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부모부터 한 사람의 전 인생까지 훑으며
어떻게 내밀한 뼛속 인생까지 영향을 주는지 보여준다.
아마도 저자가 1948년생으로 전 세계에 큼직한 사건과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다.
이 책의 주인공 롤런드도 저자와 비슷한 나이이고,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싱가포르, 독일, 리비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성장을 거쳤던 것까지
저자와 비슷하다. 그래서 이 책을 그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물론 그에게는 코넬 선생님 같은 피아노 선생님은 없었다고 확실히 말한다.^^;)
저자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친정 아빠를 떠올렸다.
우리 아빠도 세계대전의 영향에, 6.25전쟁에 피난을 가고, 여러 정치적인 격동 시기를 지나 독재 정권을 거친 시대를 살아냈다. 영국에 살았던 이언 매큐언과 한국을 살았던 우리 아빠... 비슷한 나이지만 다른 환경과 상황이다. 친정 아빠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했던 성향을 뒤로하고 할아버지가 떠난 가정을 책임지는 외아들이 되어야 했고, 삼 남매를 키워내는 아빠가 돼야 했다. 친정 아빠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롤런드는 교육을 받되 대학은 포기하고, 유망주 피아니스트였으나 결국은 테니스 강사 혹은 호텔 피아노 연주자와 각종 일을 한 이로 살아간다.
주어진 환경이 한 사람에게 가하는 영향은 상당하다.
하지만, 이에 순응하고 표류하며 사느냐, 이에 거슬러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사느냐는 본인의 선택에 따른 것이다. 각기 다르게 자신의 삶을 마주하는 이들이 나온다.
롤런드의 삶에 영향을 끼친 두 여자가 있다.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코넬의 어처구니없는 짓과 아이와 남편을 버리고 떠난 앨리사는 한국에 사는 중년 여성인 나는 결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또 그들의 입장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내가 코넬이었다면 아이에 대해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을 억제할 수 있었을까 싶다가도, 롤런드가 내 자식으로 코넬이라는 교사가 내 아이에게 그런 짓을 했다면 경멸과 분노가 극대화될 거란 생각에 코넬은 '무슨 저런 ㅁㅊ여자가 다 있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것이다.
앨리사의 극단적인 선택과 끝내 자신의 아들까지 내치는 모습도 내 상식으론 이해할 수는 없긴 하다. 역사적인 개인적 서사 자료가 있고, 작가에 대한 열정이 있더라도 많은 이들의 눈길과 사회적인 위치를 그렇게 매몰차게 외면할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용기라 할 수 있을 텐데, 내겐 더더욱 없을 것 같다.(다 이야기 못 해드립니다. 책으로 확인하셔야 할 것 같아 내용을 덜 밝힙니다.^^)
그리고 한 명 더!
공동육아로 친구와 같이 지내다 끝내 롤런드가 자발적으로 프러포즈하게 되는 첫 여인?
바로 '대프니'다. 롤런드가 그녀의 죽음에 끝까지 동참하고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다.
가장 현실적이고 지혜로우며 인생의 동반자다웠던 대프니!
아마 이 작품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인이 아니었을까?
그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게도 한 여인도 있었고, 의지했다가 롤런드를 내팽개친 여인도 있었다.
끝내 사랑을 깨닫고 늦었음을 후회했지만 끝까지 사랑했던 여인도 있다.
그들과 함께 했던 그의 인생...
그를 이리저리 내몰리며 인생의 끝을 달렸던 롤런드... 그의 인생에도 레슨이 필요했을까?
그들의 인생을 뚫고 지나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보면, 문장을 읽다 보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롤런드는 앨리사의 첫 작품을 보고 감탄한다. 앨리사의 문장은 아름답고 명료하며, 내용은 폭넓은 역사적 인식 등을 지니고 있다며 말이다. 이언 매큐언이 쓴 이 작품 <레슨>을 보며 내가 감탄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 작품엔 한 세기의 획을 긋는 사건들이 있다. 세계정세와 국내 정치적인 환경들이 작품 속 인물들의 삶에 밀접하게 영향을 끼친다. 단순히 인물의 사건뿐 아니라 이들이 살고 있는 현 상황, 환경을 함께 다루고 있는다는 면에서 작가의 역사, 정치적인 인식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정말 폭넓고 다양한 문학작품들과 작가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들이 롤런드란 인물이 읽는 작품들로 등장한다. 그뿐인가? 클래식에 이어 재즈 등 음악들까지! 원래 이렇게 다방면에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작가이던가요?
영화 같은 장면들도 읽는 내내 수두룩하게 그려졌다. 레슨을 받는 긴장감, 아들 로런스를 키우는 싱글파파 롤런드, 호텔에서 피아노를 치는 롤런드,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가운데 극적으로 재회하는 롤런드와 앨리사, 부모님의 죽음,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혈육, 60-70대가 되어 만난 코넬 선생님과의 만남... 아동학대(?)가 될 지 몰라 촬영이 성사될지 모르겠다.
강렬한 역사만큼이나 임팩트 있는 인생 속 사건, 그리고 역사가 헤쳐놓은 가정사, 긴 인생 전반에 담긴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들을 고루 느끼며 읽었다. 선택했든 선택하지 않았든 살아내온 인물들의 삶에서 나 또한 수시로 질문을 던지고 밟아가며 읽었다. 젊은 시절부터 노년의 시절에 겪는 아픔과 불편함까지 어떻게 이 한 권에 담아낼 수 있을까? 인생 전반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에 여운이 오래도록 갈 것 같은 책이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처음인데,
'1945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에 왜 그가 포함되는지 알만한 작품이었다.
책인 남긴 문장과 서사 그리고 여운 덕에 그의 팬들이 왜 그를 기다렸는지 알 것 같은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