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샘과 나르샤님이 추천한 책.
누군가가 추천한 책이면 읽고 싶어진다. 이미 한번 검증된 것이니까...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이 추천해 준 거라 바로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감탄했다. 어린이라는 표현이 이렇게 정중하게 불릴 수가 있구나... 어린이가 그냥 아이는 아니구나..
이 분의 글에 표현된 어린이들은 한 사람의 인격체였다. 일상의 어린이가 아니라 대접받는 일 인분의 사람이었다.
이미 이런 사실은 다 알지만 아무도 어린이들을 이렇게 대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내 아이니까 사랑스럽게만 보고, 예쁘게만 봤지 이렇게 인격적인 한 사람 그대로 대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도 어린이가 된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나를 존중해 주는 이 사람이 궁금했고, 생각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이 되었다.
작가님은 아이가 없기 때문에 이런 책을 써도 되는지 고민을 했다고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이런 생각은 아무나 가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해야지만 쓸 수 있는 글 같다. 육아를 하는 엄마로서 이런 선생님이라면 내 아이도 맡기고 싶다. 이런 분과 함께 생각하며 글을 쓰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한 아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작가님의 마음이 가득 담긴 책이다. 어린이날 이 책을 리뷰하게 돼서 감사하다.
다시 한번 내 아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그냥 아이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 한 사람으로서 아이를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날 읽으면 더 좋은 책. 추천해 본다.
<다시 읽고 싶은 글귀>
어딘가 좀 할머니 같은 말이지만,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인하 무인으로 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이 앞에서만 그러면 연기가 들통나기 쉬우니까 평소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감사를 자주 표현하고, 사려 깊은 말을 하고, 사회 예절을 지키는 사람. 세상이 혼란하고 떠들썩할 때일수록 더 많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마음만으로 되지 않으니 나도 보고 배우고 싶다. 좋은 친구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나 기웃거리는 요즘이다.
나는 개성이라고 하면 유별난 점, 뚜렷이 드러나는 특징, 남들과 확실히 구분되는 독보적인 무언가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면서도 장점이나 장점으로 봐 줄 만한 무언가여야 개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이 없으면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들 덕분에 개성이란 '고유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린이들이 저마다 가진 고유한 특징을 몇 가지만 꼽아 보아도 알 수 있다.
더불어 아주 뜻밖의 사실도 하나 깨달았다. 어린이와 나 사이의 우정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답이 이미 나와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사훈이니 뭐니 하며 재는 동안에 사랑은 이미 흐르고 있었다. 어린이로부터 내 쪽으로. 더 많은 쪽에서 필요한 쪽으로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내 마음에 사랑이 고여 있을 리가 없다. 모두 너무 보고 싶다.
물론 부모로서 아이를 사랑하는 일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의 것임을 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을 위해 인생의 속도와 방향을 조정하고, 어느 순간까지는 아이 몫의 결정과 그에 따른 책임도 감수하는 것이 양육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이를 키우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것까지가 양육이 아닐까 하고.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겠지만 아마 그만큼 무겁지 않으니까 그것 역시 짐작만 해 본다.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써 보면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어른스럽게 들리는지 알게 된다. 의외로 반말을 쓸 때보다 대화의 분위기도 훨씬 부드러워진다. 어린이를 존중한다는 의지가 명확히 표현되는 순간, 어른의 여유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을 진짜 권위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서로 존댓말을 쓰는 사회적인 대화를 어린이도 사양하지 않는다. 존댓말을 들은 어린이는 살짝 긴장하면서도 더욱 예의 바르게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마치 그런 대화가 몸에 밴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다.
아무 고민 없이 할 때보다 고민을 할 때가 더 힘들기 때문에 못 그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런데 생각해 봐. 어느 쪽이 더 잘 그리겠어? 그러니까 이럴 땐 괴로운 게 더 좋은 거지." 이런 말을 할 때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내가 어린 시절의 나에게 말하는 듯해서다.
만일 그때 누군가 내게 "글쓰기도 수영처럼 연습이 필요한 거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돼. 글은 자기만을 위해서 쓸 수도 있어. 그러면 내 생각을 내가 읽을 수 있거든. "너무 힘들면 쉬었다가 다시 써도 돼. 오늘 쓰고 내일 읽어도 돼" 같은 말을 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글쓰기뿐 아니라 삶의 다른 영역에도 작게나마 영향이 있지는 않았을까?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에게 그런 말을 해 준다. 그러면 요란한 시간 여행 없이도 이 말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좋은 점이 또 있다. 그 말을 드디어 나 자신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럴 때면 내 삶도 새로워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