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오래전에 사 두었지만 정말 아끼고 아꼈다가 지금에서야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매우 얇고 책도 작아서 금방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빨리 읽고 끝내는 책이 아니라 천천히 읽고 생각해 보면 좋을 책인 것 같다. 정말 어느 챕터든 다 공감이 가서 필사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책은 다시 한번 꼭 읽고 싶다. 나이 들어서 읽으면 지금 체크해 놓은 부분이랑은 분명 다른 부분에서 더 공감할 것 같다.
5년이 지났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짧은 글이 주는 여운이 있다. 작가가 친절하게 다 설명해 주기보다 해석을 독자에게 맡기는 기분이다. 그래서 좋았던 것 같다. 묵상하는 기분으로 그 여운을 느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작가는 가톨릭 신자이다. 그래서 그의 글 곳곳에 하나님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이나 밑바탕이 성경에 있구나를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나도 이런 작가가 되고 싶다. 꼭 크리스천들만 보는 책이 아니라 비 크리스천이라도 함께 공감할 수 있고, 숨은 그림 찾듯이 곳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나의 바탕은 성경이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 다시 읽고 싶은 글귀>
내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인생'은 두 가지 가능성을 충족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나는 사는 보람을 발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어떤 지점을 인생에 만들어두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를 보완해 준다.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삶의 보람에 대해 말하자며 자신의 일에서 흥미와 기쁨을 느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타인으로는 불가능한 나만의 어떤 지점이란 숙련도다. 내가 기쁨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일에서 타인이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완성도를 갖춰놓는 것이 바로 성공적인 인생의 기준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든지, 아니면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을 좋아하면 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동화 속 '요술봉' 하나만 있으면 원하는 모든 것이 내 손에 들어올 텐데, 그 마법의 봉을 구할 데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 요술봉을 대신할 수 있는 그나마 유사한 무엇인가를 찾는다면 딱 하나 있다. 바로 인내다. 인내는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다. 인내라는 말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인간은 희망하는 것을 원하는 그 순간에 갖지는 못한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몸이 아파서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내 몸은 건강한데 가족 중 누가 많이 아파서 열 일을 제쳐두고 간병에 나서야 할 때도 있다.
상황이 이렇더라도 인내하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나름의 성공을 거둔다. 돈은 행복의 전부가 아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인내는 다르다. 오랫동안 인생을 살면서 알게 되었다. 돈으로도 얻지 못하는 것을 인내로는 얻을 수 있다. 성공의 유일한 열쇠는 인내인 것이다.
나이가 들고부터는 큰 방향을 정하고 나면 사소한 것들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다.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고작 저녁 찬거리 정도다. 찬거리라고 해도 막상 마트에 들러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되면 예정한 품목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다. 운명은 마트에서 장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 중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가 20세기 종반에 지금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 운명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미의식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기 전까지 막연히 흘러가는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저항하기보다는 당당하게, 그리고 묵묵히 주변 사람들과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고 싶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앞에 문제가 닥쳤을 때마다 쉽게 결론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오늘 당장 대답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무리가 있다는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나답지 않게 명확한 결론을 앞세우는 것이 왠지 위험하게 느껴졌다는 뜻이다. 그때마다 하루나 이틀 밤을 푹 자고 이삼일을 별일 없이 보내버린다. 무턱대고 가만있는 건 아니다.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복잡하다. 그렇게 시간을 끌며 버트는 도중에 최선의 대책도 아니고 결코 현명한 해결법도 아니지만 제법 나다움 결론, 훗날 나의 어리석음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대답이 나오는 것을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경험해왔다.
한탄해본들 불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두운 얼굴을 해 보인다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라면 같은 상황에서 밝게 웃고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자신의 몫이다. 질병에 걸리고 수험에 실패하고 실연하고 망하고 전쟁에 휘말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육친의 사별,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한 사람은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몰라보리만큼 강해진다. 마침내 불행이 그만의 개인적인 자신이 되어 그의 등 뒤에서 밝게 빛난다. 불행을 한탄하며 세상과 인생에 악평을 쏟아내는 사람을 볼 때마다 다시없을 기회를 놓치겠구나, 안타깝기만 하다. 인간은 본디 강하다. 그래서 견뎌내는 것이다. 그런 견뎌냄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간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지내온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순간과 운이 없었던 날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음에 동감하게 되었다. 어차피 뜻대로 되지 않는 인내와 싸워온 세월들이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해서 부와 권력과 행복이 뒤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게으르고 머리가 나쁘다고 해서 밑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소소한 발견의 재미를 알아나가는 것도 지혜라고 해야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인생은 좋았고 때론 나빴을 뿐이다.
우리의 일생에서 타인의 역할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나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힘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당도할 수 없었다. 거부당하고 미움받고 괴롭힘을 당하고 때로는 사랑받고 구원받으며 칭찬받았기 때문에 현재의 내가 있다. 그들 속에서 지금이 내가 만들어졌다.
해 질 녘에 창밖을 바라보는데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벅차올랐다. 나는 여섯 개의 연재를 중단하고 터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언제부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휘감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다. 오직 언제쯤 저녁을 먹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있었다. '결핍'에 의해 얻어진 생활에 대한 실감이었다. 염려와 공포는 불필요한 것들을 소유함으로써 생겨난다. 이나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발견한 사실들 가운데 가장 멋진 발견이었다고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