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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철학자의 인생, 희망 이야기 - 젊은 세대와 나누고 싶은 ㅣ 100세 철학자 이야기
김형석 지음 / 열림원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00세 철학자의 인생 이야기. 100세가 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까? 그때쯤 돼서 느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한 세기를 꽉 채워본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의 변화 전부터 변화된 지금까지 살면서 그는 어떤 말을 젊은 친구들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일까? 나는 살아있는 현자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게 되었고,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내 옆에서 할아버지가 내게 이야기해 주는 듯한 느낌이다. 너무 어렵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다. 정말 어린아이에게 말하듯 쉽게 가르쳐 주신다. 100세 철학자 할아버지의 여러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가지가 있다. 오래 살려고 노력하지 말고 많이 살려고 노력하라는 말이다. 100세가 되었으니 어느 정도 사회적 위치도 올라가 보셨고, 또 지금까지 정정하게 1년에 160회 이상 강연을 하시고 글을 쓰신다.
살아있는 현역이다. 그런 그가 욕심내서 이번 1년 동안은 남들 3년만큼 살아보겠노라 하신다. 100세쯤 되었으면 쉬어도 되지 않을까. 이제는 내려놓고 그냥 살아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부터 3년 치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 말 자체가 나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나도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마 삶을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래 산다는 것이 예전처럼 기쁨의 소식은 아니다. 오히려 장수 가 죄악처럼 느껴지고 벌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그런 그가 말한다. 더 많은 삶을 살겠노라고. 많은 삶을 살겠다는 건 앞으로도 그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이고, 그만큼 삶에 있어서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살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삶의 의욕 없이 수많은 포기를 하면서 현재에 안주하고 있는 요즘 현대인들에게 제대로 된 한 마디이다. 100세인 나도 이렇게 살고 있으니 너희들은 더 힘내서 살아라... 100마디 말보다 더 진한 말이다. 알아듣는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 사람들을 불쌍하다고 하면서 일에 쫓기는 삶. 피곤에 쩔은 삶을 저주한다.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는 것도 행복인 것 같다.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고, 아직도 현시대에 배를 곪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물론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5년간 경력단절로 있으면서 다시 일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사회에 다시 섞이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 본 사람으로서 다시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 삶을 더 많이 살아야겠다. 오래 살고 길게 사는 것보다 많이 살고 싶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이 땅에 내가 온 이유를 확실히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다시 읽고 싶은 글귀>
우리는 행복을 목적으로 삼고 저기 있는 행복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값있는 성장을 계속할 수 있고, 그 성장과 노력의 과정의 속에서 행복을 찾아 누려야 한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며 옳은 일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예수는 가르쳤다.
적어도 우리가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남겨 줄 수 있을 때, 그들에게 어떤 업적을 옮겨 줄 수 있을 때 나머지 절반 인생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삶이란 인격적 사귐이며, 인격적 사귐이란 서로 악을 배제하고 선한 뜻과 인격을 나누어 가는 것으로 여기에 삶의 본질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며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무엇 때문일까? 문제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와 확고한 문제의식을 가졌더라면 먼저 주체 의식이 생기고, 그 문제의 해결이 나 문제의 내용을 보완하는 데 모든 지식들이 통일과 생명적인 내용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문제도 없이 4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으니 뒤에 남은 것이라고는 단편적인 지식의 조각들과 막연한 기억뿐이다.
칼 힐티의 책 속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잘 사는 집이라고 해도 자녀를 기를 때 돈을 벌어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밖에 주지 못한다면 그 가정에서는 진정한 인재들이 자라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난한 가정이라도 자녀를 기를 때 이웃을 위해 걱정하고 사회와 민족을 위해 마음 쓰면서 살아가면 그 가정에서는 반드시 유용한 인물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훌륭한 가정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걱정하는 사회의식을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돈을 버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어떻게 벌어서 무엇을 위해 쓰는가 함이 문제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돈을 벌어 소유하고 즐기면 된다는 사고는 배척받아야 하나 열심히 벌어서 사회경제에 이바지하겠다는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 것이다.
역시 우리는 토막 시간들을 이용해 가면서라도 공부하고 노력해서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는 내가 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 공부하지만, 둘째는 우리들의 인간적 역량을 풍부히 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개인적인 정서적 여유와 윤택함을 얻어 폭넓은 인간적 성장이 가능했다는 점은 잊을 수가 없다. 신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음식물이 필수이듯이 우리들의 정신적 성장과 인간적 풍요로움을 위해서는 전문직 이외의 취미 활동을 통한 마음의 영양이 필요하다. 특히 직업이 전문직이어서 심정의 폭이 좁거나 고갈된 사람들은 나이 들기 전에 어떤 취미활동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좋다. 경험을 해 본 사람은 그 사실을 심각히 받아들이게 된다.
인생에도 그런 면이 있다. 정신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신체적인 취미를 가지며 육체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취미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끝으로 오락의 긍정적인 필요성을 지적한다면 오락이 갖는 재창출의 뜻일 것이다. 오락을 영어로는 레크리에이션(recreation)이라고 한다 '새로 창조한다'라는 뜻이다. 오락을 통해 피로, 긴장, 스트레스를 풀고 더 수준 높은 일, 더 소망스러운 활동을 할 수 있다면 오락은 취미 활동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고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이다.
어쨌든 우리는 오래 살 욕심만 가졌지, 많이 살아야겠다는 뜻을 가져 보지 못했다. 나의 1년으로 다른 사람의 3년을 살 수도 있으며, 나의 3년이 남의 반 년도 못 되는 경우가 있다. 예수는 불과 3년 3개월의 공생활로 당신의 뜻을 다 이루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많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사는 사람이다. 근면은 선(善) 중 선이며, 게으름은 악(惡) 중 악이다.
그들은 인간의 능력을 믿었으며 인간의 힘은 자연과 세계를 바꾸며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근대사회에서의 서구인들의 개척정신이었다. 할 수 있다는 정신이 의욕과 용기를 갖고 역사를 건설해 왔다. 물론 모든 생각에는 장단점이 공존하다. 서구적인 개척 방식이 옳거나 제일이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은 유한하기는 해도 가능성을 갖고 있는 동물이다. 그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스스로의 자멸을 초래한다. 인간의 완성은 스스로의 능력을 끝까지 발휘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가는 데 있다. 그러나 문제는 '된다'는 말 자체가 아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무의식중에 '한다'는 신념과 용기를 갖고 현실에 과감하게 뛰어들어야 한다. '한다'는 각오에 차 있는 사람에게서만 '된다'는 법칙이 통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적 삶의 마무리, 즉 완결과 완성은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옳을 것이다. 죽음은 왜 있는가. 우리 삶의 내용과 의미를 완결 짓기 위해, 완결이 완성이라면 죽음이 없다면 인생의 완성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삶은 죽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완성으로 가는 것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완결 지어 남게 하는 것이라는 관념이 가능해진다. 그 완결된 것을 죽음 뒤에 남겨 주는 것이다. 부모들이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겨 주고 가듯이 우리는 우리들 삶의 유산을 죽음을 통해 사회에 남기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인간들 속에 살아남게 되며 나의 삶이 시간적인 종말을 거쳐 역사 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만일 정서적으로 보거나 정신적 위치에서 몇 살까지 사는 것이 타당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일과 더불어 삶을 즐길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까지 살았으면 좋겠다는 해답이 나올 것 같다. 사는 것이 즐겁지도 않으며 행복하지도 못하다면 더 살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그 즐거움과 행복의 기본 조건은 일을 할 수 있음이다. 청장년기에는 모르지만 늙어서 가장 아쉬운 것은 일이다. 일없는 노년기는 자신과 이웃을 위해서도 반가운 것이 못된다.
그가 훌륭한 생애를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남기는 바 있는 인생이며 그런 인생을 통해 인류는 선한 역사와 보람된 사회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남들이 오래 살기를 빌어 주는 인생이 귀한 것이다. 내가 오래 살기를 욕심내는 것은 지혜로운 자세가 아닐 것이다.
물질적 유산이 물질적인 것을 이어가며 정신적 유업이 정신적 풍요로움을 더해 주고 있으나 생명과 인간에의 사랑은 더 고귀한 뜻을 갖고 우리들의 삶을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에 귀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고귀한 것을 남기기 위해 최선의 삶을 살고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고 유산으로 남겨 주기 위해 죽음을 맞게 된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