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철학자의 철학, 사랑 이야기 - 젊은 세대와 나누고 싶은 100세 철학자 이야기
김형석 지음 / 열림원 / 201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소개란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100세가 되니 이제야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는 겸손의 말이 있었다. 이분의 강의를 유튜브에서 찾아서 들었다. 강의를 듣는 자체가 신기했다. 책에서만 봤던 분들의 이야기가 함께 공존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역사 책에서만 봤는데,, 황순원의 이야기는 교과서 속에서 봤는데, 이분의 삶 속에도 그분들이 있어다. 정말 살아있는 현자의 이야기를 듣는듯한 느낌이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김형석 교수님이 그동안 강의하셨던 것을 정리해서 책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젊은 청년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책인 것이다. 저절로 겸손해진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 같은데... 100세가 돼서 보는 세상은 어떤지도 궁금하다. 아직도 꾸준하게 자신의 관리를 하고 계시고, 공부도 하고 계신다. 90세 때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교수님이 너무나도 멋져 보였다.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안 될 것 같다는 말은 이제는 절대로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90세 때 시작해서도 10년을 하셨다. 어떤 일을 10년 했다고 하면 우리는 전문가라고 한다. 90세 때 해도 충분히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수님도 본인이 100세까지 살 줄 알았을까? 몰랐어도 90세 때 새로운 시작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냥 이분 자체로 가 참으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 말씀 한 말씀이 다 마음에 와닿았다. 삶에 대한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교과서적인 이야기 일 수도 있겠지만, 100세를 살아보니 그게 맞았다는 것을 안 사람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살아계셔서 그리고 그 연세에도 160회가 넘는 강연을 계속해 주셔서, 그리고 꾸준하게 집필활동을 해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하다.

<다시 읽고 싶은 글귀>

그렇게 업을 이룬 위치의 선배들이 돈과 개인의 권리를 앞세우는 후배들을 볼 때, '저렇게 해서는 성공도 못하며 지도자가 되기 어려울 텐데...' 하는 생각을 갖는 것은 사실 이상한 생각은 아니다. 사랑의 충언과 기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물론 똑같이 그렇게 살라는 건 아니다. 이제는 그렇게 산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시대도 아니다.

하나님 저희들은 가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유혹이 우리들을 뒤따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참되고 정직하게 살 수 있게 지켜 주시옵소서. 비록 어려움과 굶주림이 찾아오더라도 참된 믿음과 깨끗한 마음만은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날 밤 나는 돌아오면서 한 번 더 종교의 필요성과 신앙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용기와 신념을 신앙에서 얻을 수 있다면 신앙보다 더 귀한 것은 무엇인가.

행복을 기다리기보다는 행복을 만드는 사람, 행복을 받으러 하기보다는 행복을 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대수롭지 않는 명성, 불필요한 직의 감, 지극히 적은 정신적 소유에서 오는 고민 등을 버리고 언제나 인간다운 인간, 편협됨이 없는 성격을 갖도록 노력해야만 할 것 같다. 이러한 생활과 마음의 태도가 습관이 되며 사회의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전통과 빛이 된다면 우리들의 행복, 인류의 안정과 영광은 더 높아질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그대로 남을 대접하라."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오해해서는 안 되는 중대한 뜻이 숨겨져 있다. 죽음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삶은 죽음을 전제로 했을 때 알려지며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죽음은 우리들이 체험하는 순간이 곧 우리들의 존재를 무로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체험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죽음은 우리들의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언제나 죽음을 전제로 한 삶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은 하나의 관념이며 삶은 현실이다. 그런데 이 삶이 참다운 삶이 되기 위하여서는 항상 죽음을 전제로 해야 가능해진다.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삶의 완성을 아무 때라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삶의 성공과 실패는 물론 완성과 미완성을 말해 주는 것은 죽음이 있음으로써만 가능해진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들이 스스로 삶을 묻는 것도 죽음이 있기 때문이며,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이 보다 깊은 삶에의 접근을 가져오기도 하나, 죽음에는 극복이 마침내는 삶의 완성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길이 된다. 즉, 죽음은 절대적이며 필연적인 것으로 찾아들지만 죽음이야말로 삶을 해결지으며 완성을 가져오는 유일 절대의 조건도 된다.

무에서 유로 와서 다시 유에서 무로 가는 것, 그나마 앞과 뒤의 무는 영원한 것인데 유는 순간적이며 속절없는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 어찌 모순이 아닐 수 있으며 비참과 환멸이 아닐 수 있는가? 그러나 이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삶인 것이다. 유로 있으려 하면서 무로 가는 것, 끝까지 스스로의 유를 보존하려 하다가 속절없이 무로 스며들고 마는 것, 누가 인간의 이러한 현실과 실상을 부정할 수 있으며 이 엄연한 사실에서 외면할 수 있겠는가?

참다운 우정이란 서로의 존경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존경을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의 예절을 가진다는 뜻이다. 정은 예절을 초월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예절은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존경이기 때문에 마음속에는 항상 높은 예절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들의 우정이 이웃과 사회에 도움을 주며 어떤 혜택이라도 남겨 줄 수 있을까? 거기에는 간단한 원리가 뒤따른다. 우정을 단순히 자연적이며 본능적인 위치에 머물게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정신적이며 기능적인 책임을 담당케 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전자에 머문다면 우정은 친구와의 즐거움과 위로와 도움을 나누는데 그치고 만다. 그러나 우리들의 우정을 보다 높은 정신적 가치에까지 끌어올리면 거기에는 참된 우정의 대가로 이웃과 사회에 봉사가 크게 열린다.

첫째 자신을 믿어야 한다 스스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자신과 더불어 모든 것이 흔들리지 때문에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의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하며 그 위에 온갖 행복의 화초가 자라는 것이다. 자신의 인격, 선에의 가능성, 발전과 향상의 능력, 봉사와 건설의 뜻을 굳건히 믿을 수 있는 사람들만이 모든 행복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행복을 위하여서는 자기 불신은 절대로 금물이며 자신에의 회의는 모든 것의 동요를 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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