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예찬 - 숨 가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품격 있는 휴식법
로버트 디세이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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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예찬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요즘이다. 그만큼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한편으로는 부러운 마음에 이렇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게으름을 예찬한다? 내 세대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열심히 살아야 하고 바쁘게 움직여야 하고, 할 수 있을 때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통해 행동으로 배우게 되는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개근상이라는 것이 있어서 한 번도 빠지지 않는 아이에게 주는 상이다. 우등상을 타지 못하면 개근상이라도 타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개근상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개근상을 줄 만한 학생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 수도 작아졌고, 요즘에는 체험학습이라고 해서 부모님이 아이들과 함께 학교도 빠지고 여행 가는 가정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개근상이 있었던 시절은 근면 성실한 것이 상을 주고,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근면 성실하다는 것이 좋은 평은 아닌 것 같다. 왠지 답답한 사람,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요즘이다. 아무리 근면 성실하게 살아도 부모님이 살았던 것만큼 살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처음부터 욕심 갖지 않고 산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기 때문에 더 많이 즐기자!라는 생각으로 욜로라는 말이 한동안 유행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돈 버는 것에 대해 목숨 걸지 않는다. 바쁘게 사는 것에 대해 부러워한다거나, 근면하게 일한다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자신의 부모들을 봤을 때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 아마도 큰 작용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막사는 것이 아니라, 숨 가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보다 나다움으로 살려고 한다. 품격있게 게으름을 피운다는 것. 전에는 절대로 상상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일들이 이제는 그것이 자연스러워지고, 또 동경하게 되는 것 같다. 유유자적한다는 말. 내 시간을 가장 멋지게 보내는 게으름의 기술이다. 게으르게 산다는 건 시간을 지배하는 것과 같다는 말을 작가가 했다.

글쎄.. 솔직히 그 부분에 있어서는 100% 동감하지는 않지만, 품격 있는 휴식을 하고 싶다는 것은 동의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내 나이가 들통나고, 꼰대라고 불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쉬어도 제대로 쉬고 싶다. 어중간하게 게으름 피우는 건 더더욱 싫고, 놀 때는 화끈하게 실컷 놀고, 일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는 게 좋다. 제대로 일하고 제대로 쉬는 게 그게 진짜 휴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마도 요즘 세대들에게는 그 말조차 숨을 누르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딸아이에게 나와 같은 삶을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나이고, 딸은 딸이니 딸이 생각하는 대로 밀고 나갔으면 좋겠다. 아이가 게으름을 예찬한다고 해도 말리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개똥철학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게으름도 예찬했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마음은 있는 것 같다.

<다시 읽고 싶은 글귀>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대부분의 사람은 늦잠 자는 일에 죄책감을 느낀다. 톰 호지킨슨은 안기를 끈 선언서 [게으름을 떳떳하게 즐기는 법]에서 그것을 '침대 죄책감'이라고 부르면서, 이 죄악의 감정에 대해 그리스도교 일반과 특히 프로테스탄티즘을 탓한다. 늦잠 자기를 옹호하는 열렬 카톨릭교도 G.K 체스터턴은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아주 크고 근본적인 것들'을 희생시키면서 '아주 작고 부차적인 행동의 문제'를 부풀리는 현대의 경향을 비난한다. 침대에 누워서 뒹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왜 죄책감을 느끼는지 물어보면, 그들은 대개 수줍게 미소를 짓고는 늦잠 자는 게 '시간 낭비'처럼 느껴진다고 대답한다.

차는 느긋하게 마시는 것이다. 차는 결코 당신을 재촉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말하듯 차는 '차분'하고, 자기성찰을 장려하며, 일종의 섬세함, 나아가 온화함으로 서서히 심신을 상쾌하게 해준다 내가 도서관에서 흝어보았던 어느 일본 책에 따르면 그렇다. 커피는 그런 섬세함을 갈망하지 않는다. 몇백 년 전 중국의 현인 전예형은 차를 마시면 "세상의 시끄러움을 잊는다. 차는 기름진 음식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우리 시대에 가까운 일본의 미술 평론가 오카쿠라 가쿠조는 차를 짜릿하면서 매력적이라고 했다. 일본에서는 오랜 시간 불교 명상을 하는 동안 졸음을 쫓기 위해 차를 자주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차는 품위 있는 오락인 반명 커피는 노동자들이 번쩍 정신을 차리고 행동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커피는 총도 아닌 것이 종종 '샷 shot'으로 나온다. 오늘날 도심에는 거리마다 미지근한 커피 한 잔을 무슨 꽃다발이나 병리학 표변처럼 받들고서 사무실이나 건설 현장으로 돌아가는 일꾼, 점원, 은행원, 다시 말해 노동자들이 가득하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지만, 러시아인에게는 유유자적하게 바라보기를 일컫는 온갖 어휘가 있다. 특별한 목적 없이 눈을 뜨고 앉거나 서서, 뭐든 좋아하는 것에 눈길이 머물도록 내버려 두는 행위를 가리키는 어휘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 주로 남자인 그런 부류를 가리키는 단어도 많은데 그중 일부는 입을 벌리고 있음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무언가에 몰두해 입을 벌린 상태를 말한다. 이런 단어에는 멍청이라는 암시가 있기는 해도 그 이상의 심술궂은 의미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둥지에서 많은 일을 하지만, 그 모든 일이 깃들이기는 아니며 어떤 것은 선택에 따라 다른 것보다 더 많이 행한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특권층으로 태어난 경우가 아니면 집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따라서 당신이 공주라고 해도 지금 당신이 자유롭고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따금 소소하고 한가롭게 바느질을 할 필요가 있었다.

노는 것은 당신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키케로와 세네카는 그것으로 열변을 토했고, 중국부터 유럽의 가장 끄트머리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그 통찰을 이야기했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기간 동안 특정의 규칙을 관찰하면서, 당신은 당신의 시간이 주는 즐거움을 위해 어떻게 시간을 쓸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노는 것에 그 이상의 목표는 없다. 몇백 년 동안 지배계급이 성직자들과 군대와 함께 노동은 신성하다고 주장해왔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나는 균형이 잡힌 삶마다 그 중심에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시간 개념이 있다고 굳게 믿는다. 1300년경 시계가 발명된 이래, 흔히 시간의 이미지는 순간의 연속, 시각의 연속, 나날의 연속으로 따라서 우리 아포가 뒤로 뻗어 있는 세월은 그 주변의 뿌연 연무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다. 더는 시간이 영원한 신을 향하지도 않으며 영원으로 뻗어간다고 할 수도 없는데, 이 두 가지 모두 시계와 함께 어색하게 앉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또 하나의 관점은 시간을 내 주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물웅덩이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슬을 따라 소멸을 향해 고리에서 고리로 순종적으로 뛰는 대신에 나는 이 웅덩이에서 멈추었다가 저 웅덩이에서 뒹굴곤 한다. (중간 생략) 당신은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어딘가로 향하고 있지는 않다. 때로는 뒤쪽이 앞쪽이 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하며, 왼쪽이 오른쪽이 된다. 이따금 당신에게 받을 빚이 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가 당신을 올가미로 잡아 궤도 위로 끌어와서는 어른처럼 앞을 보라고 하고 분, 시간, 센트 달러 등을 세라고 할 것이다. 저항하는 것은 부질없지만 그래도 저항하라.

필립 라킨이 꼭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말을 인용하면, 시간은 사실 그 안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웅덩이에서 한가롭게 지낸 뒤 저 웅덩이에서 느긋하게 시간은 그 안에서 당신의 인간성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요, 그 안에서 당신 존재의 무한성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로 끝을 맺는다면, 한마디로 그 안에서 에우다이모니아, 즉 행복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에 다른 좋은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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