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순간 - 삶의 의미를 되찾는 10가지 생각
스벤 브링크만 지음, 강경이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은 어렵다. 아무리 쉽게 써 놓은 글이라도 해도 나에게는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이 철학인 것 같다. 그런데 철학책이 요즘은 다른 형태로 나오고 있다. 에세이식으로 나와서 철학자들을 쭉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더불어서 쓴 책들이 많다. 현대식으로 바뀐 철학책이라고 할까. 이 책은 심리학자가 쓴 철학책이다. 심리학자가 철학책을 쓴다는 것도 관심이 생기지만, 그것을 강연식으로 만들었다는 것도 꽤 흥미가 있었다.

10강으로 해서 한 철학자의 대표적인 사상과 더불어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그래서 어느 철학책보다도 재미있게 읽게 된 것 같다. 나는 이 10가지의 주제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다루었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 흥미가 갔다. "그들이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지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삶이라는 꿈에서 깨어나면 다시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더 현명하게 살면서 죽음을 그다지 걱정하지 않을 텐데."

아마도 수의를 입어본 사람이라면 그 말에 동감할 것 같다. 사람이 죽을 때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한다. 태어날 때 빈손으로 태어난 것처럼 죽을 때도 우리는 빈손으로 간다. 그래서 주머니가 없다. 죽을 때 입을 옷 한 벌이 다인 것이다. 죽음 체험을 하면서 나는 이때 깨달았다. 물질에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물질에 초점을 두게 되면 너무나도 후회할 것을 그때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초점을 바꿨다. 가치에 두는 것으로... 그래서 일을 찾을 때도 돈보다도 가치에 중점을 두고 찾게 된 것이다.

우리는 평생 살 것처럼 생각하고 산다.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게 나의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언젠가 죽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에게는 아직 먼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이야기다. 언제 하늘나라로 갈지는 하나님만 안다.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과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수 없다는 사실만 깨달아도 삶의 의미가 많이 달라질 것이다. 내 삶에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죽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가장 와닿았고, 나 또한 인간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산다. 그렇게 되면 죽는다는 것이 두렵지도 않고, 아쉬움도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죽을 때 제대로 눈 감고 죽고 싶거든, 후회 없이 살도록 해야 한다.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두는 것보다, 진짜 가치 있는 것에 마음을 주고 유산을 남길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다시 읽고 싶은 글귀>

그 자체를 위해 몰두하는 활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은 주로 윤리적 행위라 부를만한 쪽을 가리킵니다. 즉, 그가 생각하는 의미 있고 잘 사는 삶, 그리고 행복은 선한 행동을 하는 삶입니다. 선한 행동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행복의 핵심 요소입니다. 예를 들면,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돕는 일이 선한 행동인 이유는 그 일을 한 사람에게 부가 따르기 때문이 아니라 (물론 이런 결과들을 낳을 수도 있지만요) 그 행위 자체가 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덕이라고 부를 만한 지혜나 용기, 절제 등은 그런 선한 행동을 할 능력을 주는 자질이지요.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이라는 개념은 요즘 이야기하는 '덕 있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요즘 '덕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지나치게 점잔 빼며 조금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어감이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은 성격 특성이나 인성 같은 심리학 개념과 더 가깝습니다. 단지 윤리적 관점에서 본다는 점만 다를 뿐이지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상에는 그 자체로 목적이면서 선한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고, 선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우리 삶의 이끄는 관점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선한 것은 그걸로 이익을 얻거나, 단순히 그걸 좋아하기 때문에 선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선하다는 이유 그 자체 때문에 선을 좋아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단단히 지켜야 할 실존적 관점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라이프 코치 토니 로빈스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성공이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당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람과 함께, 원하는 만큼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소망에 따라 다른 사람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생각을 표현한 말입니다. 로빈스에 따르면 성공이란 욕망 너머에 있는 다른 사람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성공의 부품이나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것입니다. 인간이 존엄성을 지닌 존재라는 칸트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결코 서공을 이렇게 정의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대우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공과 관련이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죄책감은 우리의 도덕성을 지탱하는 접착제입니다. 죄책감은 지키지 못한 약속의 이면이라 할 수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그런 감정으로 무척 고통스럽더라도 아예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삶은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발달심리학은 타인에게 책임 있는 존재로 대우받았다는 사실이 아이를 책임감 있는 존재로 만든다고 말합니다. 니체의 표현처럼 타인과 약속할 권리를 지닌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과정에서 죄책감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버틀러의 말처럼 "죄책감은 주체가 되는 것을 가능케" 하니까요.

약속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설령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일에는 존엄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약속은 우리 삶의 단단한 관점이 됩니다. 결코 도구화될 수 없는 본질적인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러한 약속을 토대로 굳건히 서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인간성은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말 것입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의미에서 자기는 물건이 아니며, 결코 도구나 상품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최적화하거나 현금화해야 할 자원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에 가격을 매겨서는 안 됩니다. 자기는 오직 존엄성을 갖지, 가격을 갖지 않습니다. 자기를, 그러니까 우리를 구성하는 관계의 중요성을 잊지 않는 것은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드는,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일입니다. 이러한 반성적 자기 관계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의무도 도덕성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요.

장인의 일은 우리가 세상에 참여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과감히 앞으로 나가 타자를 향하고 세상에 자신을 활짝 여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처럼 세상과 타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근본적이고 윤리적인 이상이자, 로이스트루프가 표현한 윤리적 요구입니다. 이러한 이상은 우리에게 단단히 딛고 설 중요한 실존적 관점을 제공합니다. 파괴하지 않고서는 결코 도구화할 수 없는 삶의 단단한 관점이 되지요.

용서에 대한 데리다의 해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진정한 용서는 무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용서가 수단이 된다면 더 이상 용서일 수 없으니까요. 둘째 용서할 수 없는 것만 용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용서, 예컨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말므로스의 용서 같은 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을 상호성과 대칭선, 예컨대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다는 논리로 이해합니다. 반면 용서라는 개념은 관계가 상호적이고 대칭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명백하게 도전합니다.

카론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지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삶이라는 꿈에서 깨어나면 다시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더 현명하게 살면서 죽음을 그다지 걱정하지 않을 텐데."

지금 당신에게 엄청나게 중요해 보이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성취했고 성취하고 싶은 모든 것, 살아가며 맺어온 모든 관계, 일상적인 온갖 사건과 걸림돌과 걱정도 당신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이 짧은 삶을 왜 스스로 파괴하는 일에 보내는가? 우리 존재는 밤에 날아다니는 반딧불이와 같다. 삶은 잠시 훅 타고 오르고 나면 사라진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큰 영감을 주는 생각이다. 당신은 바로 이곳에 매우 짧고 집약적으로 머문다. 그런데 왜 당신에게 주어진 삶을 최대한 이용하지 않는가?

우리는 삶의 의미를 순전히 도구적이고 경험적인 관점에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하고 건강한 삶은 좋지만, 그런 삶이 곧 의미 있는 삶은 아니지요. 도덕적이고 의미 있는 삶은 내적 가치가 있습니다.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행복이나 건강을 위해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게 그냥 좋은 것이기에 도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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