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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상처를 허락하지 마라 -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단호해지는 심리 수업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한윤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5월
평점 :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실제로 정말 이런 사례가 있는 것일까? 이렇게 답답하고 어리석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왜 소냐는 이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궁금해서 그다음 장이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 읽으면서 마음이 아파서 그다음 장을 빨리 읽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다음에는 뭔가 좀 더 나아져 있겠지...
이 책은 한 심리학자가 자신의 내담자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식으로 적었다. 소냐는 일기처럼 글을 이어나갔고, 그 글이 끝나면 작가가 이어받아서 왜 이 여성이 이렇게 행동하고 생각하는지, 왜 플랭크의 행동이 그러한지를 설명해 주는 형식이다. 영화를 보면서 중간에 누군가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느낌이었다.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서 답답함을 느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여기에 나온 주인공들의 과거를 들어보니 한편으로는 이해도 가면서 다시 한번 양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 같다.
분명 육아서는 아니다. 육아서보다도 사람의 심리와 내면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과 더불어 나르시시즘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이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두 주인공들의 양육에 있어서 큰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만큼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하게 된다. 한 생명이 그냥 자라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랑과 관심 속에서 자라야만 한다. 하지만 사랑도 사랑 나름이고 관심도 그 양을 적절하게 조정해야 한다. 이것은 요리 레시피처럼 설탕 몇 스푼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같은 상황 속에서 분명 밝은 아이로 잘 자란 사람들도 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때그때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르다. 그래서 규정되어 있는 레시피는 아이마다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로서 가장 많이 고민해야 하고,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 같다.
너무 많은 관심을 주어도 혹은 너무 적게 주어도 아이는 전혀 다른 아이로 자란다. 나도 늘 고민하는 부분이다.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이라 너무 아이를 위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또 어떤 때는 나를 위한 시간을 갖겠다고 아이를 방치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절적한 게 무엇인지 처음 엄마가 된 나에게도 참 어려운 구분인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아이가 소냐처럼 혹은 플랭크처럼 자라지 않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읽었다. 그리고 정말 육아에 대해서 엄마로서 많이 배워야겠고, 엄마의 철학을 가지고 아이를 양육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책인 것 같다.
<다시 읽고 싶은 글귀>
프랑크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린 소년은 어른이 되려 하지 안호 자신을 돌봐줄 누군가를 찾는다. 상처를 받은 후 치유하지 않으면 자신의 일부가 형성되는데 그걸 자아 상태라고 부른다. 예컨대 프랑크는 어릴 때 혼자 방치됐거나 버려진 경험이 있어 트라우마가 생겼고 결국 그 연령대로 자아 상태가 형성되어 다 큰 성인이 된 다음에도 헤어지거나 남겨지는 상황에 부닥치면 그때처럼 행동한다.
현대 심리학은 나르시시즘을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본다. 유년 시절 겪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자기애적 성향이 커지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자존감은 무의식적으로 두 가지 방어 수단을 활용한다. 하나는 악습, 과보호, 수용이고 다른 하나는 애정과 공감의 부족 그리고 거부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건 아이를 소유물처럼 대하는 것만큼이나 방치하는 것도 아이의 자존감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부모에게 지나치게 종속되거나 방치된 아이는 주어진 역할에 순응하며 어른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자신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요구를 거부한다. 수용하든 거부하든 어른의 요구는 아이가 바라는 것과는 다를 테니 분명 정신적으로 외로웠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나르시시즘은 상처 입은 자존감을 살짝 가려주는 엉터리 해법에 불과하다.
방어수단으로 거부를 사용하는 아이는 부모의 보살핌이 부족한 경우이고, 방어 수단으로 과보호를 사용하는 아이는 버릇없이 자라 습관을 잘못 들인 경우다. 부모의 과보호 속에서 자란 사람은 작은 시련에도 크게 좌절한다.
이런 양육 과정의 가장 큰 문제는 양육자의 행동이 아이의 성향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오로지 양육자의 욕구에 맞춰 아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두 계획하고 통제하려 한다. 느리고, 서툴고, 무지한 아이를 위한 배려 따위는 없다. 이런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고 즉각적으로 아이의 일을 해결해준다. 때로는 아이를 위해 대신 사회적인 투쟁을 해주기도 한다. 솔직히 이런 행동은 자신들을 위한 일이다. 부모가 인내심이 없거나 자식이 실패하는 모습을 도저히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식이 항상 행복해야 한고 매번 성공해야 하며 아무런 문제 없이 살기만을 바란다면 그건 부모가 나르시시즘에 빠진 것이다. 자식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이가 일을 스스로 해내도록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렇게 자란 아이에게 남는 건 열등감뿐이다.
아이의 버릇을 망쳐놓는 또 다른 사례는 부모의 자기애적 결핍을 해소해줄 아이의 재능에 과도하게 후원하는 경우다. 자식이 내가 예전에 이루지 못한 성공을 꼭 해내야만 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엄마들이 있다. 이런 유형의 양육자는 과거에 상처 입었던 본인의 자존감을 높이고 주변에 자랑하기 위해 자식을 장신구처럼 키운다. 아이가 정말로 그런 삶을 원하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부모 유형은 자신의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 아이를 이용한다. 자식이 자신보다 더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는 과대망상을 품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때 아무런 제약도 제재로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 결국 아이는 건강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다. 과대망상 뒤에는 자신의 강점과 능력을 강화할 마음이 조금도 없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무능력한 아이의 모습이 숨어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일부러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면, 아이는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는 슬픔 혹은 좌절이 정확히 어떤 이미인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공감할 수도 없다. 공감 능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나르시시즘의 특성이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들은 자아 성찰을 가능케 하는 자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서 늘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