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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
최윤아 지음 / 마음의숲 / 2018년 3월
평점 :
아이 없는 전업주부. 잘 못한 것도 없는데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 그녀. 아이가 있으면 육아 때문에 그런다고 하지만, 아이도 없이 전업주부라고 하면 우선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것이 현실인가 보다. 나도 아이 없이 전업주부라는 생활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녀의 마음을 100%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공감 가는 부분이 참 많았다. 대한민국에서는 결혼한 여자가 직업을 갖지 않고 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분명 그녀도 자신만의 시간이 있을 텐데, 아이 없이 전업주부로 있는 그녀의 시간을 모두 헐값으로 매긴다는 그녀의 말이 공감이 갔다. 나는 출산을 하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무심코 말하는데 그 안에는 '노는 여자'의 뉘앙스가 담긴 말을 해서 내가 화를 낸 적이 있다. 뭘 그런 것을 가지고 화를 내냐? 할지 모르겠지만, 왜 육아가 노는 거야?라고 반문하는 나의 질문에 대답을 못했다.
아이를 양육하는 나도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데, 아이 없는 전업주부는 어련할까?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결혼 전에는 은행에서 오히려 이유를 낮춰주겠다며 대출을 받으라고 권유까지 받았는데, 퇴직 후 집 이사 문제로 대출을 받으려고 은행에 문의를 했더니 나는 안 된다고 한다. 아무리 남편이 있어도 나는 노는 여자이기 때문에 대출이 되지 않는다는 그 말에 기분이 상했던 적이 있다. 큰돈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 자존심이 상했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왜 결혼한 친구들은 진작에 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을까? 하는 그녀의 독백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만약에 알았다고 하면 결과가 달라지나? 결혼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도 예전과 다른 취급을 받고, 같은 일을 했던 남편이 일이 힘들다고 투덜거리지만, 그 투덜거림 자체가 부러워지는 시기가 올 때쯤, 그녀는 자신의 1년을 뒤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책 두 권을 썼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작가는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남편을 축하해주면서도 뭔가 아쉬움이 남는 자신을 보면서도 많은 생각에 잠긴 것 같다. 1년 동안 책도 많이 읽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풀타임이 아닌 파트타임으로 일도 하면서 지내는 요즘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그녀의 말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여성의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솔직한 문장으로 잘 썼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책의 제목을 아주 잘 지어서, 책 제목의 도움을 받을 것 같다는 예상도 해본다.
< 다시 보고 싶은 글귀>
“보건료가 너무 많이 나와서 직원이랑 통화를 하는데 ‘무직이시잖아요’라는 말을 열 번도 넘게 하는 거야. 그 ‘무직’이란 소리에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던지... 나 그날 보드카 마셨잖아.” "애도 잘 크고 남편도 회사생활 잘 하고 있고, 따져보면 우울할 이유가 없지. 근데 말이야, 내가 없어. 내 인생의 경계가 허물어져 그들의 인생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회사를 그만두고 만난 그녀들은 어떻게 참았나 싶을 만큼 적나라하게 그간의 고충을 늘어놓았다. ‘진즉에 솔직히 좀 말해주지’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됐다. 워킹우먼에게 미묘한 열등감을 갖고 있는 전업주부는 최소한 그들 앞에서만큼은 그늘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배려’는 내게 ‘배제’로 다가왔다. 새로 발령받은 팀은 회사가 힘을 실어주는 부서는 아니었다. 팀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인원이 없었고, 나를 제외한 유일한 팀원은 다음 달 퇴사를 앞두고 있었다. 입사 한 달 만에 한 차례 사표를 내기도 했던 그는 주어진 일은 무리 없이 해냈지만 결코 일을 찾아서 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쉬는 동안 읽었던 책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이라고. 그때 내가 팀원 없는 팀에 배치된 걸 ‘좌천’이 아니라 내 역할을 확장할 기회로 받아들였다면, 회사생활에서 한 번도 삐끗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걸 마음 깊이 수긍했다면 아마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어느 한쪽이 100% 잘못해 헤어지는 연인이 드물 듯, 오로지 회사의 일방적인 잘못으로 직장생활이 끝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나는 꼬였었고, 그걸 차근차근 풀 의지도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말하고 싶다. 결혼한 여직원에게 베푸는 섣부른 배려는 독이 될 수도 있다고. 모든 시그널이 그렇듯, 배려가 배제로 오독될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고. 그땐 미처 전하지 못한 이 말이 지난 1년 동안 참하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운동처방’을 내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깟’ 운동이 일시적인 기분은 물론 사고방식까지 바꿀 수 있다는 걸 요가를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정신이 무너지면 육체를 건드려야 한다.’는 작가 공지영이나, ‘이혼의 아픔을 근육 운동으로 극복했다’는 연애 칼럼니스트 곽정은의 글을 읽고서도 긴가민가했었는데 직접 경험해 보니 알겠다. 그들의 말은 진실이었다.
사람들은 왜 전업주부를 ‘논다’고 표현할까. 단순히 말하는 이가 무신경하기 때문일까. 1년째 집안일을 도맡아 온 나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가사 특유의 ‘휘발성’이 명백해 노동하는 주부를 노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가사 노동의 흔적은 시간과 함께 증발한다. 기껏 낑낑대며 온 집안에 청소기를 돌려도 청문 몇 시간 열어두면 다시 원점이다.
결혼부터 퇴사까지 내가 걸었던 길을 곰곰이 복기해 봤다. 자의와 타의를 무 자르듯 명확하게 가를 순 없다. 우리 사회는 명백히 타의에 의한 경력단절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자의’의 영역도 분명 존재한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플랜 B를 의식하고, 거기에 기대기도 하고 영영 빠지기도 하면서 전업주부가 되는 여자들도 적지 않다.
내가 내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남도 내 시간을 헐값으로 취급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기에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하게 굴었다. 내 시간이 공짜가 아님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작업이었다. 동시에 스스로에게 주입했다. 내 시간은 내 거라고. 돈을 벌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실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라고. 이 부탁 저 부탁 들어주다 정작 ‘시간 빈곤층’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간 자리에 작은 알맹이라도 남기기 위해서.
무엇보다 ‘육아 문제’는 정말 복병이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언젠가는 육아 문제에 부딪힐 것’이라는 경고를 거의 듣지 않고 자라 온 우리 세대는 이 문제를 마주하고 심각한 당혹감을 느꼈다. (아마도 어른들은 우리가 사회에 진출할 때쯤이면 해결책이 생길 거라 막연히 기대했기에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경고도 없었고 복선도 없었기에 더 당황했고, 더 두려웠다. 직업을 선택할 때까지만 해도 가정과의 양립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는데, 막상 일을 하고 보니 이 문제는 쉽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미디어는 ‘슈퍼맘’ 프레임으로 여성이 일과 가정 모두를 가질 수 있다고 끊임없이 주입했지만, 잠깐이라도 슈퍼맘으로 살아본 여자들은 슈퍼맘은 허울일 뿐 실은 일과 가정에서 양쪽으로 시달리는 ‘상처맘’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안다.
첫 시험에 한방에 붙은 사람은 절대 모를 경험과 노하우가 내겐 있다. 내 숱한 실패는 책을 쓰는데 찰떡같은 글감이 됐다. 이쯤 되니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시간만 낭비한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는 사실을. 내가 의미를 발견하려고 덤비기만 하면 개떡 같은 경험도 목적지까지 가는 찰떡같은 징검다리가 되어 준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가장 신경 쓰였던 건 나 자신이었다. 내가 내 눈치를 본다는 게 나조차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일상은 별다른 위기 없이 잘 흘러가고, 몸도 영유아기 이후 가장 편했다고 할 수 있으나 가끔씩 아주 불편한 질문이 느닷없이 불어와 잔잔했던 내 일상을 사정없이 휘저어 놓았다. ‘지금 살고 있는 방식이 너 스스로가 더 좋아지는 방향이 맞니?’ 이런 질문 앞에 서면 자꾸만 도망치고 싶었는데 그건 명백히 ‘아니’라는 뜻이었다. 또 실패할까 봐 상처받을까 봐 웅크리고 사는 건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이 아니었다. ‘실패하고 상처받더라도 뭔가 해 보려 할 때의 나’가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이 상태로 내게 주어진 이 생에 당당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