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자를 위한 살인 가이드
로절린드 스톱스 지음, 류기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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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구원


여자는 인질이다를 읽은 이후에 읽은 책이 이 책이라는 사실이 어딘가 운명적인 느낌을 준다.

왜냐면 이 책은 원래 다른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제목이 흥미로워 보여 즉흥적으로 고른 책이기 때문이다.


소재는 상당히 흥미롭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 셋이서 꾸미는 살인계획!?' 이라니.

매드맥스를 보고 난 이후로 흰머리를 흩날리며 총포를 쏴대는 카리스마 넘치는 할머니들을 종종 상상했던 터라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구원서사를 보여준다.

우선 주인공인 메그, 그레이스 그리고 대프니는 각자 자신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겪었던 뼈아픈 과거를 가슴속에 묻고 아직 그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주인공인 메그는 17살에 미혼모로 아기를 낳아 입양보내야 했던 아픈 과거가 있으며 가정폭력범이자 가스라이팅 장인인 남편을 만나 평생을, 그가 죽는 순간까지 그에게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겪으며 살았다. 그리고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자메이카에 두 살된 딸을 두고 영국으로 떠나며, 딸과 함께 영국에서 살기 위해, 악착같이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의 딸은 홍역으로 세상을 일찍 떠나버리고 그레이스의 계획은 영영 실행되지 못한다. 또한 그레이스는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이 두 소녀를 살해한 사건에 대해 그것을 미리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짊어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대프니. 유색인종인 대프니는 대학교에 입학 후 끔찍한 포주 앤드류에게 걸려 성매매를 강요당한다. 번지르르하 외모와 화술로 대프니에게 자신이 대프니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 앤드류는 현재에도 미국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이렇게 각자의 아픔을 지닌 할머니들은 우연히 아침 10시30분 경 카페에 들어 와 도움을 청하는 니나를 만나게 되고, 곧바로 니나에게 애착을 느낀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이 끔찍한 일을 겪고 있는 니나를 구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을 하면서 각자 자신들도 스스로의 끔찍한 과거로부터 구출해낸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괴로운 과거로부터 일흔이 될때까지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던 이들은 니나를 구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의견을 내고, 맞서고 발언하고 나서면서 각자의 슬픔 내지는 괴로움을 마주하고 앞으로 한발 나아간다. 


아주 고무적인 소설이다. 어딘가 동화 같은 느낌도 주지만, 여전히 여성을 희생양으로 한 끔찍한 일들은 제3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소설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다행이다. 니나로 인해 탄생한 이 새로운 가족은 앞으로 더 단단한 행복을 구축해 나갈 것이다. 나는 이런 소설이 좋다.


"요는 말이야," 모종의 선을 넘는 것처럼, 그레이스가 아까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는 이미 그 선을 넘었다. "중요한 건, 우리는 범죄든 뭐든, 가장 의심을 사지 않을 만 한 인물들이라는 걸 기억하는거야. 다들 알고 있어?" - P16

대프니는 1960년대에 모든 이가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사용했던 그 혐오스러운 단어, ‘유색‘을 기억했다. 까탈스럽게 군다거나 더 심하게는 ‘싸움닭‘이라는 말을 들을까봐 그 단어에 반감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그 말에 한소리하면 무슨 말을 들을지 대프니는 알았다. 그 말을 사용한 사람은 즉각 그런 의도로 쓴게 아니라고, 너무 예민하게 군다고 했을 것이다. 한번은 파티에서 앤드루의 친구들 중 하나가 자신은 색깔에 연연하지 않는다며, 왜 유색인종들은 그런 얘기를 지겹게 반복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걸 들어야 했다. 대프니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어본 지 십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 P215

대프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각자의 사연을 서로에게 짐 지우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건 여성들이 짐을 이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는 사연의 무게를 함께 견딘다.
"이번엔 제대로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말했다. "우리는 승리할거야." - P278

나는 남을 위해 비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던 것을 떠올렸다. 전혀 모르는 남을 위해 가스실 대기 순번을 교환해준 사람, 미친 인간이 총을 들고 걸어올 때 교실 입구를 막았던 사람, 배가 가라앉을 때 남들을 먼저 태운 사람, 대학살이 벌어질 때 어린아이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감싼 사람, 이 모든 일을, 그 이상을 해낸 사람들. 사람은 놀라운 존재다. 나도 나설 필요가 있었다. - P289

"그런 일들을 한꺼번에 멈추는 건 불가능할 거에요." 데스가 말했다. "젊은 여성을 착취하는 그런 놈들은 언제나 있을 테니까요."
"한번에 멈출 필요는 없어." 대프니가 말하고는 야채를 썰면서 한동안 생각에 잠긴 채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놈들에게 메시지를 보낸다면, 즉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옳지 않다는 메시지를 보낸다면, 한번 더 숙고하지 않을까?"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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