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대멸종 ㅣ 안전가옥 앤솔로지 2
시아란 외 지음 / 안전가옥 / 2019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멸종의 이름을 한 선물 내지는 축복
1. 저승 최후의 날에 대한 기록 / 시아란
대멸종을 맞은 인류를 저승의 관점에서 바라본 책. 과학과 신화가 한데 어우러져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멸종원인과 신화적인 대처방안이 대비된다.
2.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 / 심너울
심너울 작가의 건조하고 시니컬하면서도 비판적인 문체가 좋다. 꼭 이코노미스트 칼럼을 읽는 것 같달까. 술술 넘어가면서도 묘하게 심각한 그의 문체를 마주할 때면 장면 상관없이 문득 문득 웃음이 터진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도 누군가의 시뮬레이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상당히 타당해 보이는 것은 내가 너무 sf장르에 잠겼기 때문일까. 이전이라면 '아~이것도 재밌는 생각이네' 하고 넘어갔겠지만 근래 인터넷에서 모 게시물을 읽은 뒤로는 꽤나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계속 들고 있다. 내가 읽은 게시물은 양자의 특성에 대한 것이었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이중 슬롯 실험에서 왜 양자가 그러한 특성을 갖고 있는지 여러 가설 중에 하나를 설명한 것이었다. 이중 슬롯 실험에서 우리의 정신을 혼란하게 하는 양자의 특성은 바로 우리의 '관찰'에 결과값이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봤던 게시물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의 관찰 여부에 따라 양자의 값이 바뀌는 것은 결과값의 양자가 존재는 하지만 아직 구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꼭 게임 세상 속에서처럼 말이다. 게임 속에서 우리의 아바타가 앞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면 우리에게는 앞 광경에 대한 모습만 보인다. 물론 우리의 뒤에도 게임 속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게임 캐릭터가 뒤를 돌아보기 전까지 그 세계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의 관찰이 게임속 세상 존재여부에 유의미한 인자값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심너울 작가의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 를 읽으면서 저 게시글 생각이 났다. 아마 작가는 양자의 이런 특성을 생각하며 글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설탕젤리를 개많이 먹으면 당뇨 대신 이 세상의 메모리에 접근할 수 있게 되어 초능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 세상이 무엇인가의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에는 상당부분 진지하게 동의하고 있다.
내용과는 별개로 심너울 작가는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문체를 지닌 작가이다. 다른 책에서는, 다른 소재를 가지고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낼 지 기대가 될 정도로.
3. 선택의 아이 / 범유진
대멸종 SF와 동화 내지는 신화 그 사이에 있는 듯한 단편. 이 비극적인 이야기에는 현실이 얼마나 반영되어 있는 걸까.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세계는 소수의 개체만이 이득을 보는, 멸망해가는 세계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 이득보는 개체마저도 영혼이 더럽혀져 갱생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현존하는 지옥 그 자체의 모습같달까. 너무도 이기적이고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순수한 영혼은 질식되어 삶을 이어갈 수 없는 그런 세계. 행복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좁고 희미한 데 비해 절망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뚜렷하고 확정적인, 그래서 그런 끔찍한 미래에 닿기 전에 사라져버린 아이들의 삶이 구원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 이 소설은 현실의 절반도 담아내지 못한 것이리라. 현실은 항상 상상보다 끔찍하고 처절하기 마련이니까. 절대자가 존재한다면, 인간이 두려워하는 지옥은 인간이 사는 삶 그 자체에 깃들어 있는 것임을 보고 있으리라.
★4. 우주탐사선 베르티아 / 해도연
와. 이 단편이야말로 대멸종이라는 주제에서 내가 보고 싶었던, 내가 기대했던 이야기. 멸종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희망까지 너무 너무 무척이나도 내 취향의 작품.
나는 이런 이야기가 너무 좋다. 익숙하게 반복되는 일상, 하지만 문득 생각해 보면 시작이 기억나지 않는 순간들. 스스로를 자각하는 AI의 존재와 부모를 넘어서는 자식들. 구체적으로 멸망한 세계. 그리고 광활하고 아득한 우주 속에 홀로 남아버린 사고체. 그 완전한 고독을 인식하는 순간 밀려오는 두려움과 절망감 그리고 정적. 이 모든 순간이 담겨있는 소설이다. 단편이라 아쉬울 정도로.
인류, 아니 사고하는 지성체의 존재 증거는 호기심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성체 존재의 근원은 호기심이 아닐까? 호기심이야말로 지성체가 스스로의 존재 이유에 대해 답할 수 있는 대답이자 그 스스로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동력 아닐지. 호기심이 없는 지성체란 고요히 우주를 떠도는 감자 덩어리와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
개소리. 다들 미쳤어! 우린 500년 동안이나 우주를 떠돌아다녔다고! 아무도 접근한 적 없는 우주의 중심을 탐사했다고! 근데 내가 한낱 기판 위에서 춤추는 양자에 불과하다고? -P375 레몬의 대사 중
5. 달을 불렀어, 귀를 기울여 줘 / 강유리
내가 뭘 읽은 거지...? 단편 내용보다 작가의 말이 더 흥미로웠다. 대멸종을 판타지적 세계관에서 풀어낸 작품. 서술 방식이 굉장히 자유롭고 도전적이어서 꼭 인터넷에 게재된 소설을 읽는 느낌도 난다. 그래도 여전히 정령사니 마탑이니 하는 주제는 완전히 몰입하기엔 좀 생소한 영역이다.
여러 가지 소설을 읽다 보면, 종종 글을 읽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이건 약간의 쓴맛과 빈정이 곁들여진 표현이다.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어야지..? 하는 생각이 가끔 드는 글자모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장에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궁금함에 계속 읽어나가게 되는 글들이 있다. 이 단편도 그런 종류의 글이었다. 그리고 그 궁금증에는 마빈에 대한 빡침이 80퍼센트 정도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멍청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자신이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멍청이들이라 하겠다. 그들은 정말이지... 하긴 자신이 똑똑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는, 아니 적어도 똑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멍청이들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미약하게나마 존재한다는 점에서 최고 멍청이의 칭호를 부여하기엔 적절하지 않다. 자고로 최고 멍청이는 자신이 똑똑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데서 대체로 울분이 쌓여있으며 자신이 느끼는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함을 무척이나 공공연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경악하게 만드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리고 이 단편의 주인공 마빈은 나를 스쳐지나간 저 최고멍청이 몇몇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제기랄...
한편으론 사회 복지정책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든다. 결국 가장 아래 층에 있는 사람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품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때 몰고 올 자기파괴적 행동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 너무나도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그것은 마계의 달을 불러온 마빈의 경우처럼 대멸종을 야기하는 파괴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그리고 꼭 지금 코로나 판데믹 상황에서 계층상관없이 전세계 모든 사람이 백신을 맞고 면역력을 확보해야 내 자신이 안전할 수 있는 것처럼...
남이 설명도 없이 싸 놓은 똥을 치우는 게 얼마나 좆 같은 일인지 넌 모르지라고 묻는 대신에 나는 말끝을 흐렸다. - P174
장미와 아지사이는 모두 호기심 충만한 탐사원이었다. 이제 활동 내용을 단순한 정보 수집으로 제한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모든 정보를 스스로 분석하고 해석할 생각이었다. 목표는 없었다. 그저 호기심과 질문, 그리고 다음 목적지가 있을 뿐. - P389
대현자라서 그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몰라야 좋은 일들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대현자라서 그는 늘 궁금했다. 세상은 바보가 행복한 곳일까. 바보가 행복할 수 있는 곳이 좋은 세상이라지만, 그렇다면 바보가 행복한 곳은 좋은 세상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새해 태양이 잠시 눈을 감아 세상에 똥이 싸질러진 이 세상 속에서도,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고 미래를 꿈꿀 것이다. 1년을 꿈꾸고 10년을 꿈꾸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보듬고 미워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 ... . - P465
|